때로 우리는 사랑을 사고에 비유하곤 한다. 자신의 의도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평온하게 앞으로 잘 걸어가는 나를 사각에서 치고 들어와 박아버리는 것과 같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고를 불안하고 불온한 것으로 생각한다. 동시에 예상치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매력적으로 느낀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랑을 사고에 비유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는 친구가 정말 기분이 좋은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그날도 이어폰을 끼고 무심코 음악을 들으면서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고 했다. 음악은 <인생의 회전목마>가 나오고 있었는데, 음악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면서 절정부분에서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졌다고 했다. 지하철이 지하를 뚫고 나와서 한강철교를 탄 것이었다. 갑자기 밝아져 탁 트인 시야로 넓고 거대한 한강이 모습을 드러냈고, 맑은 하늘의 햇빛은 지하철 차창을 관통해서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우연한 순간에 정말 우연히도 귀에서는 <인생의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이었다. 친구는 그 순간의 벅찬 감동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맑은날의 한강 철교 위,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이 일화가 떠올랐던 건 오늘 나도 조작 실수로 늘 듣던 음악의 리스트가 랜덤으로 꼬였기 때문이었다. 난 보통 가장 최근에 다운받은 음악들 위주로 MP3를 듣는다. 자연스럽게 예전에 받았던 음악들은 잘 듣지 않게 되고, 뭔가 누적되고 퇴적되듯이 리스트들은 아래로 아래로 쌓여간다. 오늘도 난 평소처럼 리스트의 가장 위에 있는 음악을 틀었다. 첫 곡이 끝나고 그 다음곡이 나와야 할 차례인데, 아주 한참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이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예상치 못했던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생각보다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다시 랜덤 듣기에서 순서대로 듣기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지만, 예상못한 그 옛날의 내 취향이 너무 좋았어서, 멍하니 계속 듣고 있었다. 그렇게 장르를 바꿔가면서 예전의 음악들을 듣게 되었다.

아주 예전에는 팝송을 좋아했고, 조금 지나서는 재즈를 좋아했고, 최근에는 희한하게도 K POP을 많이 들었다. 뒤죽박죽 뒤섞이며 K POP과 팝송과 재즈가 나오는 게, 우연찮게 내 취향의 음악을 틀어주는 바에 간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장례식장에서 꼭 틀었으면 하는 음악 리스트가 있다.’ 고 하던 대학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장례식장은 음악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최근에는 생각을 바꿔서 아예 내 장례식장에서는 Milonga 가 열렸으면 좋겠다. 내 장례식은 댄스홀에서 열리고, 사람들은 나를 추모하면서 즐겁게 어울려서 와인에 질좋은 음식에…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탱고를 췄으면 좋겠다.

탱고를 배우면서 내 예상보다 탱고가 더 좋아졌던 이유 중에 하나도, 탱고는 즉흥이기 때문이었다. 난 탱고가 어느정도는 짜고 추는 댄스 스포츠인 줄 알았다. 물론 알고보니 전혀, 이 춤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즉흥이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지만 더 좋았던 것 같다. 평생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 즉흥이기 때문인듯하다. ‘춤을 추다 스탭이 꼬이면, 그게 바로 탱고인 거죠’ 라고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느끼하게 말한 대사는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춤을 조금 배우고 나니 그 영화에서 알 파치노의 춤은 탱고도 아니고 막춤도 아닌 희한한 몸부림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알 형… 탱고 좀 열심히 배우지 그랬어요. 개인 교습 받았을 텐데.

어쨌거나 즉흥이란 건 사람을 불온하게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사고에 비유하는 것이고, 사랑이 그만큼 즉흥적이고 위험하지만 매력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즉흥적이지 않은 것, 계획적인 것,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재미없는 것이고 뭔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생을 살면서,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가면서 느끼는 건, 인생을 길게 봤을 때 즉흥적이고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도처에 산재해 있긴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들이 켜켜이 쌓여가는 패턴에는 어느정도 규칙이 있고 그게 나이를 먹어갈수록 경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예상치 못한 모험과도 같았다. 점점 경험이 쌓이고 나이를 먹을수록, 패턴화가 되고 규격화가 된다는 것이 안정감을 줬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것이 갑갑함을 줬다. 마치 바다의 물결과 파도가 가까이에서 보면 한치 앞도 예측이 불가능한 불규칙의 향연 같아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는 사실 사선의 결들이 굽이굽이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패턴의 확장임을 발견하는 것처럼.

재밌는 건 사실 어렸을때는 그런 즉흥성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서부터 제일 싫어하고 혐오하는 건 갑자기 불러내서 장기자랑을 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즉흥으로 춤을 시킨다? 막춤이라도 춰 봐라? 정말 싫어했다. 평소에 하지 않은 것을 갑자기 즉흥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수준 높은 즉흥은 연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현대무용이나 탱고 같이 즉흥이 강조되는 춤들일수록 끝없는 고통의 연습을 필요로 하고, 재즈의 경우 연습하지 않은 패턴이 즉흥 연주에서 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즉흥은 사실은 연습의 산물인 것이다. 헌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즉흥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즉흥이 그냥 되는 것인 줄 안다.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이런 연습되지 않는 즉흥을 강요하는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고, 거의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길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는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처음 마주하는 그 상황이 싫어서 계속 엄마만 찾아댔었다. 엄마는 당황해서 계속 나를 저기 저 입학식 줄에 가서 서라며 등을 떠밀었다. 나는 전에 해본적 없는 그것이 너무 싫고 무서워서 계속 대열을 이탈해서 엄마를 찾아갔다. 그 이후에도 나는 전에 해본적이 없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피아노를 배울 때는 굉장히 적성에 잘 맞았던게, 시키는 것만 하면 됐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전에는 항상 반복적인 연습이 있었고, 새로 배우는 것들도 그전에 하던것과 많이 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게 피아노가 급격히 싫고 무서워졌던 게 즉흥연주를 위해 재즈 피아노의 패턴을 배우고, 코드라는 걸 배우기 시작하면서였다. 이전에는 악보에 써 있는 걸 치면 됐지만, 갑작스레 악보에 써 있는 B, D, G 같은 정체불명의 알파벳들을 보며 즉흥 연주라는 걸 해야 됐다. 나는 그 시스템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드럼을 배울 때도 나는 정해진 패턴만 하도 반복하다보니 선생님이 그걸 지적할 정도였다. 비유하자면 나는 ‘건너갔던 돌다리를 다시 되돌아와서 계속 두들겨보는’ 스타일이었다. 기초를 닦는다는 입장에서는 나쁠 건 없지만 모험심이라든가 다음 돌다리를 건너뛰어보려는 호승심이라든가 아니면 경로를 이탈해서 시냇물로 뛰어들려는 객기같은 게 전혀 없었다. 어찌 보면 그냥 겁많은 쫄보라고 해야될까. 나는 그래서 드럼을 치면서도 즉흥연주에 굉장히 약했다.

그랬던 나였기 때문에 내게는 ‘재즈’ 라는 장르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내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고, 나로서는 그 모든 ‘즉흥’ 들이 마치 천재들이 노니는 감성의 무도회장과도 같아 보였다. 나처럼 악보를 외우고 패턴을 외우려는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그런 감성의 즉흥적 춤판은 가닿지 못할 영역과도 같아 보였다.

글을 쓰면서도 원래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려고 했기 때문에 즉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는 특히나 즉흥이 개입할 여지가 현저히 적은 장르였고, 시나리오를 써놓으면 써놓은대로 찍고, 찍은건 번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변하기 시작했던 건 연극 때문이었다.

희곡이란 걸 써 놨다고 배우가 그대로 연기를 할 수 있으리란 보장 같은 건 없었고, 연습 중간에라도 더 좋은 장면이나 대사나 커뮤니케이션이 나오면 즉석에서 수정해야했다. 연기에 대한 공부의 갈증이 있어서 수업을 들었을 때는 제일 처음 했던 게 바로 ‘에쭈드’ 였다.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가 가장 강조했던 연기 연습방식으로, 기초적인 상황만을 제시하고 모든 것을 즉흥으로 풀어가는 연습방법이었다. 연극을 배우고, 연습하고, 해가면서 나는 점점 즉흥이란 것을 배워나가고 익숙해졌던 듯하다.

나의 글쓰기도 조금은 스타일이 바뀌었고, 이제는 틀에 박힌것처럼 모든 걸 계획해놓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비교하자면, 예전에는 딱 적당한 양의 짐을 실은 채로,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띄워 경로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고자 했다.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많은, 무지막지한 양의 짐을 잔뜩 실은 채로 바다에 배를 띄워서 바람 가고 마음 가는 대로 가고자 한다.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굶어죽진 않을 테니, 그 헤매는 와중에 대단한 모험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즉흥이란 그렇게 훈련되고 익숙해지면서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즉흥의 재미를 몰랐다면, 아니 즉흥이란 게 훈련되는 거란 것을 몰랐다면, 나는 계속 두려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오히려 틀에 박히고 예상된 대로만 흘러가는 인생에서 편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로 지도에 나오지 않은 샛길로 빠지는 재미를 알게 되니, 그건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해주는 양념이었다. 원하는 조건의 정해진 사람과 선을 보러 나가는 것보다는, 사고를 당하듯 치명적이고 우연한 사랑을 모두가 꿈꾸니 말이다. 오늘도 그런 예상치 못한 모험을 연습하고, 또 기대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