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먹자. 밀면 먹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있었던 일이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여름 햇볕 아래에서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은 버스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버릇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11분, 6분, 2분, 그러다 갑작스러운 곧 도착 표시들에 맞춰 몇 명이 버스에서 타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곤 했다. 12시 27분, 점심시간이 한창일 때였다. 내가 타려는 20번 버스는 하필 방금 지나간 바람에, 14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나는 배가 고팠다.

그래서였는지, 정류장에 선 사람들의 잡담 중에서도 유독 귀에 쏙쏙 들어오는 얘기가 있었다. 바로 ‘점심 메뉴 고르기’ 50대와, 20대 여자는 모녀지간으로 보였다. 억양으로 봐선 바다를 보러 타지에서 온 관광객은 아니었다. 분명하고도 친숙한 부산 사투리. 두 여자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햇볕이 뜨거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점심 메뉴를 고민 중이었다.

“엄마, 여기서 남천 쪽으로 내려가면 빵집 많다? 남천동을 빵천동이라고 한다더라.”
“에헤이! 그래도 밥을 무야지(먹어야지), 빵을 무가(먹어서) 되겠나?”

“아니면, 131번 타고 시청에서 내려서 거제시장에 칼국수 먹으러 가까? 거기 생활의 달인에도 나왔다던데”
“아이고, 가시나야! 이 더운 날에 칼국수는 무슨 칼국수! 더버(더워서) 죽을라카나.”

“아니면 엄마, 49번 타고 부산대 갈래? 내 거기 맛있는 데 많이 안다!”
“됐다, 마! 그 대학생들 먹는 밥집이 다 거기서 거기지. 저거 20번 타면 서면 간다 아이가?”

“아, 엄마! 서면이나 부산대나 밥집은 똑같다! 서면에 술집 많아서 낮에 가봐야 볼 것도 없고. 아예 남포동 갈래? 엄마 생선구이 좋아한다아이가.”
“가시나가 오늘 와 이라노? 니 안 덥나?”

참 쿵짝이 안 맞는 모녀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도대체 저 모녀의 점심 메뉴는 무엇이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짜증 섞인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와 모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바뀌었다. 웬만큼 정차할 만한 버스도 다 지나갔다. 내가 기다리던 20번 버스는 이제 5분 뒤 도착. 샤워하고 나온 지 20분 만에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 제발 버스에 사람이 많지 않았으면. 에어컨을 좀 시원하게 틀어뒀으면.

“엄마는 그러면 뭐 먹고 싶은데?”
“그냥, 마 시원하고 맛있는 거.”
“그러면 밀면 먹으러 가자.”
“밀면 집이 여기 어데 있노?”
“바로 앞에 있네. 광안 밀면.”
“저기 밀면이 맛이 있다카더나?”
“엄마, 밀면은 엥간하면 다 맛있거든요? 어, 초록불이다. 길 건너자.”

남천동부터 시청, 부산대, 서면, 남포동 자갈치까지. 10여 분 동안 먼 길을 돌고 돌던 모녀의 점심메뉴가 결국은 바로 길 건너 밀면 가게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같은 부산 사람으로서 결국 밀면을 선택한 그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해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곧이어 다행히도 한산한 20번 버스가 왔고, 나는 도로 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부산스럽게 길을 건넌 모녀의 여전히 찡그린 표정에, 만족스러운 점심 메뉴를 골랐다는 안도감이 언뜻 비쳤다. 사실 그들이 헤맸던 남천동, 시청, 부산대, 서면과 남포동 자갈치에도 밀면 가게는 있을 텐데. 또 뒤집어 말하면 어디에나 있으니, 어디든 들어가도 괜찮았던 걸까.

부산 사람이라면 어느 동네, 어느 골목에서든 볼 수 있는 ‘밀면’이라는 두 글자. 시원하고 칼칼한 그 두 글자 덕분에 좋았던 기억들이 많았다. 학창시절엔 땡볕에 한바탕 축구를 하고 나면 꼭 밀면을 먹었다. 물밀면을 시켜도 국물보다 면이 더 많았던 사장님의 인심도 기억이 난다. 냉면보다 가격은 저렴한데, 주린 배는 더 든든히 채워주던 밀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과 함께 먹을 땐, 큼직한 손만두를 슬쩍 밀어주기도 했던 시원하고 칼칼한, 밀면.

만나기로 했던 친구에게 방금 막 20번 버스를 탔다고, 한 15분쯤 걸린다고 톡을 보냈다. 톡을 보내고서 잠시 고민하다 바로 또 톡을 보냈다. 야, 우리 오늘 점심은 밀면 먹으러 가자. 아니 꼭 거기 아니어도 괜찮지. 너희 동네에도 맛있는 밀면 가게 있을 거 아냐. 그치? 있지? 그래 거기에서 먹자. 밀면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