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 인간의 윤리를 말하다

식욕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욕심이다. 윤리적인 인간이 가져서는 안되고 인간 개인의 자기파괴를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파멸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잠재된 욕구로 해석된다. 

사실 식욕 혹은 식탐이 불러 일으키는 공동체의 파괴는 현 시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상 중 하나다. 우선 인간의 식욕은 1차적으로 자연파괴와 환경파괴로 이어지는데 많은 이들이 이 부분조차 간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거나 인터넷 기사만으로도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소 한마리를 키우기 위해서 사용되는 어마어마한 곡물의 양과 그 곡물을 키우기 위해 벌어지는 반생태적 모습들을 알면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덜 먹고 싶은 심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인류의 식량 재분배에도 모순되는 효과를 가져다 주는데, 우리가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키우는 소에게 들어갈 어마어마한 곡식을 식량이 없어 죽어가는 지구의 동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엄청난 인류애를 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무분별하게 포획되는 참치, 다랑어들과 지느러미만 베어내고 바다에 버려지는 수많은 상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천혜의 커피향을 얻기 위해 만들어지는 루왁커피에는 수많은 사향고양이들이 똥꼬에서 피를 흘렸고, 요즘과 같은 월드컵 열기와 함께 하는 치킨 한 마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닭들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케이지 안에서 그들의 생을 채우지도 못하게 튀김기 속으로 들어간다. 

미식의 시대가 도래할수록 인류는 인류애가 사라지기도 하고 다른 수많은 생명의 가치를 지구공동체의 한 생명으로서의 가치로 덮어버리는 무자비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종교적으로 볼때 식욕은 인간이 경계해야할 목록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죄악으로 치부된다. 기독교에서 다루는 칠죄종, 7가지 죄악 중 하나다. 물론 음식에 대한 욕심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양을 넘어서서 필요 이상의 것을 취하는 것을 모두 식탐이라 일컫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에 대한 갈구’ 또한 어쩌면 식탐의 일종일 수 있겠다. 어쨌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는 옛말처럼 먹는 일이 가장 기본시 되는 인류인지라 모든 욕심은 어쩌면 다 이 식욕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식탐에 대해 일컬으며 ‘배고파하는 사람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돌리는 것 또 돌려주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고 할 정도로 음식에 대한 철학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이 몸이 필요로 하는 이상 먹지 않은 것을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은 자기 통제력을 키우기 위함도 있었지만 자기가 먹을 음식을 줄임으로써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휴머니즘도 있었다.

불교 또한 음식에 대한 경계를 빼놓지 않고 있다. 기독교처럼 죄악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지만 식욕, 식탐, 음식에 대한 욕심은 불교의 이상향인 해탈의 경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한다. 물론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음식 그 자체에 대한 갈구만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점차 커지는 인간 욕심 전반에 대한 이야기다. 초기불교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걸식’을 했던 이유도 바로 식욕을 놓기 위함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이른바 ‘빌어먹는 행위’를 함으로써 좋은 음식, 나쁜 음식에 대한 기준과 분별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수행법 중 하나였다. 걸식은 랜덤으로 딱 일곱 집의 문을 두드리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운이 나쁘면 그날은 쫄쫄 굶어야할 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불교에서는 세상을 만물이 윤회하며 연결되어 있는 초연결사회(일종의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원주민들과 비슷한 입장)로 보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치고 취하는 것을 경계시 했다. 그럴 경우 ‘업(業, Karma)’가 쌓인다고 보았기 때문에 업력이 많을수록 해탈의 경지로 가는 길에 발목을 잡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될 수 있으면 살생을 금하고 절대적으로 필요시에만 육식을 허락했다. 

식욕과 식탐에 대해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는 종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슬람교다. 이슬람교도들은 ‘라마단’ 이라고 불리는 ‘절기’ 에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금식을 해야하는 규율이 있다. 무슬림이 지켜야할 5대 의무 중 하나인데,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야 한다. 글쓴이가 뉴질랜드 유학시절 무슬림 친구를 만났을 때, 라마단을 겪고 있던 친구가 아주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다. 라마단은 무슬림들에게 평생을 해온 일상이기 때문에 사실은 별로 고통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 친구 말로는 그 곳이 뉴질랜드라서 더 힘들다는 말을 하였던 적이 있다. 자신의 고향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대가 상대적으로 짧았는데 뉴질랜드는 해가 떠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참고로 뉴질랜드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여름에는 저녁 9시 가까이 되어서야 해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때 라마단이 걸리면…)

이처럼 인류는 아주 오랜 역사와 함께 식욕과 식탐에 대해 숱하게 고민하고 번민하며 그것이 자칫 인간의 크나큰 욕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경계해왔다. 식탐, 식욕이 인간의 욕심에 가장 근본적인 씨앗이 될 것이라는 인류의 현인들의 관찰과 발견은 괜한 노파심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인간의 욕심이 인류문명을 초단기간에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의 장점도 염두해볼 일이다. 물론 단순히 그것에만 매몰되어 지속가능한 미식의 시대를 잃지는 않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말이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