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심신을 달랜 역사

따지고 보면 지친 심신을 술로 달래는 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대항해시대 유럽의 선원들은 거친 파도와 시린 해풍을 견디며 마셨던 독하디 독한 럼(Rum)주를 마셨고, 조선시대에는 식욕부진으로 염식을 앓던 영조 임금에게 약방의 제조가 반주를 권하기도 했으니 술이 약 아닌 약으로 사람들에게 소비된 것은 동서를 막론해왔다.

한국의 사정만 살펴보면 1960년에 접어들면서 도심의 샐러리맨들을 위한 대폿집이 성행했고, 그 이후 유행처럼 호프 집, 로바다야끼, 이자카야, 스몰 비어 등등 여러 형태의 술집들이 지친 하루의 끝에 취기를 더했다. 뿐만 아니라 식품위생법에 의거, 단란주점이나 유흥주점이 아닌 일반음식점에서도 식사와 함께 부수적인 음주 행위가 가능한 우리나라의 특성상 굳이 술을 먹기 위해 술집에 가지 않더라도 식사 도중 자연스럽게 술을 마실 수 있다. 한 끼 식사와 술안주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그 덕에 우리의 음주 문화는 안주가 꽤 푸짐한 편이다. 치즈 몇 조각에 즐기는 와인이나, 소량의 마른안주와 마시는 위스키, 브랜디와는 달리 소주나 맥주, 막걸리는 다양하고 맛있는 안주와 함께 즐긴다. 혹자는 ‘술은 술맛으로 먹는 거지, 안주빨 세우는 건 매너가 아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술과 궁합이 잘 맞는 안주는 존재한다. 소주는 구운 고기나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있는 탕, 찌개류와 잘 어울리고 맥주는 보통 마른안주나 튀김류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 정설이다. 쏘삼(소주와 삼겹살), 치맥(치킨과 맥주)이나 피맥(피자와 맥주) 같은 단어가 고유명사화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별미로 더운 여름에 뜨거운 국밥과 시원한 맥주를 함께 먹는 것도 추천한다!) 그리고 막걸리에는 보통 각종 전 종류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만, 사실 안주 없이도 충분한 술이 또한 막걸리이기도 하다.

막걸리의 추억

소주, 맥주, 막걸리를 한국의 대표적인 술이라고 분류한다면, 그 중에서도 막걸리는 유난히 다른 술에 비해 친근한 느낌을 준다. 소주나 맥주가 절대 금기의 영역인 미성년자 시절에도, 왜인지 모르게 막걸리만큼은 종종 마신 기억이 있다. 명절 때 친척 어른들도 막걸리는 괜찮다며 한 사발을 권하기도 했고, 제사 지낸 뒤 음복하라며 주신 청주는 맑은 술인데도 꼭 막걸리 비슷한 맛이 났다. 아마 큰 사발에 든 청주를 두 손으로 받치고 마셔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대학생 때는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참 반가운 막걸리를 만나기도 했다. 섬유 공장의 집진기 청소, 공사판 막노동 일을 할 때면 꼭 점심 식사에 막걸리를 반주로 곁들였다. 요즘은 안전에 대한 인식이 꽤 높아져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때만 해도 ‘점심 때 막걸리 안 마시면 힘이 안 난다. 오후에 정신이 몽롱하다.’라고 말하는 인부들의 고된 심정이 안전 불감증마저 덮어버리곤 했었다. 또 과수원에서 일을 했을 땐 새참으로 떡이나 빵, 과일뿐만 아니라 푸짐한 삼계탕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그 메뉴가 뭐가 됐건 간에 물과 사이다와 막걸 리는 늘 함께였다. 보통 마음이 괴로울 때 술을 찾는다고 하는데, 막걸리는 특히 몸이 힘들 때도 자주 찾는 술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막걸리로 일종의 반주를 배운 셈이다.

친구들과 모여 틈만 나면 술을 마시러 다녔던 대학신입생 시절. 주머니 사정 뻔한 우리가 마셨던 술도 결국은 소주, 맥주, 막걸리 중 하나였다. 괜히 진지한 얘길 하거나, 친구가 실연을 당했을 땐 소주를 마셨다. 가볍게 기분 내고 싶을 땐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막걸리는 삶이 ‘웃플 때’ 마셨다. 뭔가 힘들고 짜증은 나는데, 청승을 떨기 싫고, 그냥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키며 될 대로 되라지! 외치고 싶은 그런 날에. 특히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조금 허름하고 어둑한, 3000원 짜리 싸구려 안주가 있는, 못난 얼굴로 한바탕 웃는 장면이 어울리는 그런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막걸리와 함께라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웠다.

최고의 안주, 사람

서른이 되어 이십대의 그 취기 가득한 날들을 되짚어 보면, 어쩐지 막걸리를 마실 때만큼은 안주에 대해 별 특별한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싸구려 안주를 파는, 소위 ‘현대판 주막’같은 곳만 골라 갔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그걸 뒤집어 말하면 사실 막걸리를 마실 때에 곁들이는 음식이야 뭐가 됐건 크게 상관없었던 것 같다. 파전을 하나 주문해도, 그 파전이 나오기 전에 이미 막걸리를 두 사발쯤 들이켰으니까.

오히려 기억에 남는 건 막걸리를 둘러싼 풍경이다. 막걸리 가게로 가던 길 그날의 날씨, 지저분하고 부질없고 진부한 낙서가 가득한 가게의 벽지, 이가 나가있던 멜라민 수지로 만든 가벼운 사발, 그리고 내 앞에서 나와 함께 취해있던 사람, 서로의 표정.

술이란 게 원래 그렇다. 술 자체로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지만, 술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는 있다. 특히 막걸리를 허물없이 나눠 마실 수 있는 사이라면, 꽤 믿을 만한 친구일 것이다. 거창한 안주도 필요 없고, 모던한 인테리어나 잘 차려 입은 옷도 필요 없이, 막걸리를 들이킬 수 있는 사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가 최고의 술안주가 되어 슬픔을 달래고, 흥을 돋우는 그런 사이라면 말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려 한다. 며칠 간 세찬 비가 내렸고, 오늘은 하늘이 맑다. 조만간 다시 축축한 장마전선이 온 세상을 적실 것이다. 그날은 기필코 막걸리를 마실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