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의 고향

동쪽에 위아래로 길게 뻗은 산맥과 강줄기, 서쪽으로 펼쳐진 평야, 그리고 제각각의 특색을 지닌 3면의 바다를 접한 한반도는 특징 좁은 면적에 비해 지역마다 다채로운 환경을 지닌다. 그 덕분에 지역마다 나름의 특산물도 있다. 성주 참외, 진영 단감, 공주 밤, 의성 마늘, 횡성 한우 하는 식으로. (몇몇 특산물은 지역이 겹치기도 하지만 별 문제 될 건 없다. 어디든 맛있으니까.)

수박 역시 함안, 고창, 양평, 음성 등등 다양한 곳에서 특산물로 활약하고 있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광주 무등 수박이다. 기존 수박과 달리 검은 줄이 없는 것이 특징인 무등 수박은 최고급 수박의 경우 한 통에 몇 십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고가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아직 한 번도 무등 수박을 먹어보지 못했지만(비싸서..) 먹어본 사람들의 말로는 그 값을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맛있다는 건지…

흔히 지역 특산물이라고 하면, 그 특산물의 고향이 그 지역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친숙한 과일이나 채소들 중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할 곳이 고향이거나, 심지어 한국이 고향이 아닌 것도 있다. 특히 수박은 지금처럼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과일이 되기까지 얼마나 먼 거리를 굴러왔는지 모른다.

수박의 진짜 고향은 놀랍게도 아프리카 이집트다. 더 놀랍게도 수박은 사막 기후에서 잘 자라는 과일이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의 수박 당도는 상상초월이라고.) 그 수박에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구르고 굴러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수박을 한자로 서과(西瓜), 서쪽에서 온 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수박’이라도 현대화된 농업 시스템이 없던 시절 사막 기후에 적합한 과일을 성공적으로 재배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당연히 공급 부족, 수요 과잉 현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고려 시대 땐 수박 한 통에 쌀 반가마니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초기까지도 수박을 ‘금박’이라고 불렀다고. (그러고 보니, 배추 값이 폭등하면 김치를 ‘금치’로 부르던 작명 센스의 역사도 꽤 유구하다.) 이 정도면 수박 요놈 요거, 이집트에서 한반도까지 상경해(?) 성공한 놈이었다.

수박을 즐기는 방법

여름이면 수박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한 손에 들고 먹기 좋게 썰어서 껍질의 흰 부분만 남을 만큼 알뜰하게 먹는 방법. 한입 크기로 썰어서 얼음과 사이다를 함께 부어 화채로 만들어 먹는 방법. 한 여름 계곡에서는 수박 한 통을 거칠게 반으로 쪼개서 다같이 숟가락으로 파먹는 방법도 있다. 뭐가 됐건 타들어 가는 속을 해갈하는 데에는 수박만한 것이 없다.

올 여름엔 유난히 수박 주스가 유행이다. 웬만한 생과일주스 프랜차이즈 매장에선 다들 수박 주스를 메인 상품으로 내걸고 있다. 심지어 커피 전문점에서도, 토스트 가게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수박 주스를 판매한다. 나도 올해에만 수박 주스를 5잔 정도 마셨다. 각기 다른 매장에서 마셨기 때문에 조금씩 맛은 달랐지만, 그래도 꽤 정직할 수준으로 많은 양의 수박이 들어간 수박 주스였다. 이럴 바엔 그냥 집에서 믹서기로 갈아 마시는 편이 경제적일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수박 종류도 다양하다. 앞서 말한 무등 수박처럼 외형이 독특하고 가격도 독특(?)한 수박이 있는가 하면, 속이 노란 망고 수박, 1인 시대에 부합하는 복수박(애플수박), 그리고 씨 없는 수박까지. 개인적으로 자취를 하며 겨우 3L 용량의 음식물 쓰레기통을 사용하는 나는, 한 번에 먹기 좋고 껍질이 얇은 복수박(애플수박)을 선호한다. 물론, 어떤 수박이든 사다주면 뭐든 잘 먹기야 하지만.

수박씨가 없어서 좋은 건, 사람

음식물 쓰레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매번 꼭 헷갈리는 품목들이 생긴다. 가령 껍질을 예로 들면 바나나 껍질은 음식물 쓰레기, 수박 껍질은 일반 쓰레기이다. (수박 껍질을 잘게 썰면 음식물 쓰레기로도 배출 가능) 간단히 말해 얇고 무른 껍질은 음식물 쓰레기로, 딱딱하고 거친 껍질은 일반 쓰레기로 분류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또 갑각류의 껍데기나 생선뼈는 음식물 쓰레기이고, 어패류 껍질은 일반 쓰레기란다. 이쯤 되면 그냥 외우는 방법뿐인가. 다행스럽게도 갑각류나 어패류를 집에서 먹을 일은 거의 없다.

수박씨는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되는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핵과류 과일의 씨가 일반 쓰레기라는 설명이 있을 뿐, 수박씨에 대해선 언급이 없으니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박씨를 잘근잘근 잘도 씹어 먹으니까. 항간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구분법으로 ‘동물이 먹을 수 있으면 음식물 쓰레기, 아니면 일반 쓰레기’라는 말도 있던데, 당장 내가 먹을 수 있는 수박씨는 당연히 음식물 쓰레기이지 않을까?

수박씨를 하나하나 골라내며 먹는 부지런한 분들에게는 씨 없는 수박이 굉장히 반가울 것 같다. 일단 먹기도 편하고, 먹고 나서 꽤 쌓여있는 수박씨를 음식물 쓰레기로(혹은 귀찮다면 일반 쓰레기로) 버릴 필요도 없으니까. 사실 나는 씨가 있으나 없으나 다 먹기 때문에, 아주 큰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박씨에는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다고 하니 나로서는 굳이 씨 없는 수박을 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쨌든 수박씨가 없어서 좋은 건 수박이 아니라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알알이 박혀 있던 씨의 기억을 모두 잃은 씨 없는 수박의 허전함을 누가 알겠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씨를 제거당한 수박의 허망하고 수치스러운 기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