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뜬금없는 언어학적 위로

‘생각도 일종의 언어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하여 소쉬르와 같은 언어철학자들은 언어야 말로 인간이 가진 생각의 말로라고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과연 언어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인간, 그 자체가 언어다.’ 글쓴이가 한 말이다. 물론 언어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근거로 지어낸 말이다. 언어를 광의(廣義)적으로 해석했을 때, 인간이 하는 모든 것 그 자체가 언어라는 말하고 싶었다. FBI와 프로파일러들이 싸이코패스 살인마들을 색출할 때 유심히 살펴보는 그들의 무의식적 표현이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서 거짓말을 하며 코를 수십번을 긁어댔다는 행동 하나하나까지, 그들은 보이지 않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 하다못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시체를 앞에 두고 그들이 하려던 마지막 말을 들으려는 수많은 검시관과 법의학자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렇게 인간은 죽으면서까지도 자신의 신체를 통해 마지막 말을 남긴다. 

이렇게 세상을 이해한다면 ‘언어’의 영역은 그야말로 너무나 방대해서, 혹은 세상 그 자체가 언어 투성이라서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그래서 언어학에서는 랑그와 빠롤이라는 두 개념이 있는데, 이는 과연 언어를 연구하는데 있어 어디까지 혹은 무엇을 연구해야하는 것인가에서 출발했다.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앞서 언급했던 FBI의 프로파일러들이 들으려는 언어는 언어학이라기보다 범죄심리학에 가깝고, 죽은 사람의 말을 듣는 법의학자들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기보다 의학을 다루는 사람에 가깝다. 

언어학은 인간이 직접 의사소통하는 실증적 언어만을 연구하자는 결론에는 도달했지만, 사실 인간이 쓰고 말하는 언어도 광범위하기는 마찬가지다. 예컨대, 아기가 옹알이로 하는 말들을 우리는 언어학 연구대상으로 넣을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술에 취해 반쯤 정신이 나가 무슨 소리인지도 구분이 안가는 사람의 말을 언어학의 연구대상으로 삼기는 곤란할 것이다. 소쉬를 비롯한 초창기의 언어학자들은 바로 이 언어의 광의성을 극복하고자 랑그와 빠롤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그 중 언어학은 ‘랑그’ 의 영역만 연구한다는 합의를 봤다.

(랑그와 빠롤에 대한 설명은 꽤나 관념적이고 지난한 이야기다. 이 글은 학술적인 글이 아니므로, 학술적인 이해와 설명보다 이 글이 진행하고자하는 방향성에 맞추어 설명을 하고자 한다)

랑그가 가진 키워드는 ‘체계’다. 이에 반해 파롤은 ‘현상’ 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각 개인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 그 자체다. 얼굴에 뾰루지 하나가 났다면 그것은 내 피부에서 발생한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개인의 언어가 모여 거대한 집단적인 체계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랑그가 된다. 뾰루지가 하나일 때는 ‘현상’이지만, 온 얼굴을 뒤덮으면 어떤 질병의 체계적인 ‘증상’이 되듯이 말이다. 

랑그는 하나의 공식이고 규칙이다. 빠롤은 개인의 언어다. 즉 앞서 말한 어린 아이의 옹알이는 빠롤은 될 수 있어도 랑그의 범주에 들어갈 순 없다. 나이가 드신 우리 어머니는 점점 나와 내 동생의 이름을 헷갈려 부르신다. 두뇌의 노화현상이라 어쩔 수 없지만, 내 이름을 내 동생이름으로 부르거나 내 동생을 내 이름으로 부를 때만큼은 어머니의 발화는 빠롤의 대상이지 랑그가 될 수 없다. 랑그의 영역에선 내 이름이 존재의 명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발화현상을 초기 언어학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접어들고 후기구조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연구는 점점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는 과학의 물리이론연구와도 비슷한 것이다. 대상(물건)을 연구하던 것에서 물질로, 물질을 연구하던 것에서, 부품이나 부분으로, 분자로, 원자로, 입자, 소립자, 미립자, 중성자… 그 작디작은 세부적인 디테일 안에도 사실 규칙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어학 또한 국가나 민족 단위의 큰 언어에서 점차 안으로 관심을 가진다. 예컨대, 방언과 같은 지역사투리나 한 언어에서 분화된 언어, 세대별 언어 등과 같이 말이다. 거시적 입장의 랑그의 세계에서는 한 단계 아래의 랑그는 빠롤 수준이지만 사실은 그 빠롤들의 랑그가 존재했던 것이다. 

랑그와 빠롤의 관념적 체계는 사실 굳이 언어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론 언어학자들이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지만 언어자체가 세상인 만물에 이 관념을 적용할 수 있다. 인간사회가 만든 체계 아래 개미의 세계는 아주 미세할 뿐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미묘한 규칙이 있다. 이를 적용시켜보면 어린아이의 옹알이도 일정한 규칙이 있을 것이고, 술 취한 이의 횡설수설에도 일정한 규칙이 존재할 것이다. 

랑그와 빠롤은 또한 대중성과 예술성의 관계에도 존재하는 이야기다. 춤, 노래, 미술, 음악 그리고 이런 인간의 표현과 행위들이 모여서 나오는 연극,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일정한 랑그의 세계다. 소위 이른바 예술이라는 것도 사실은 랑그의 세계를 더 따르면 대중성에 더 가까워진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은 대중들이 알기 쉬운 언어다. 한국사람들끼리 모여 의사소통이 되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우리가 한국사람만의 랑그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세계는 일반적 언어와는 다른 표현적 언어기 때문에 그 이해의 범주가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의 세계가 위대한 것은 그 사람들의 빠롤언어를 하나의 랑그의 세계로 편입시킨 데에 있다. 물론 고흐는 자신이 가진 빠롤을 생전의 대중들에게 인식시키진 못했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뒤, 그의 빠롤은 랑그를 만들었다. 자신의 발화, 언어적이든 비언어적 표현을 사람들이 가진 랑그 세계에 침투시키는 예술가만큼 한 개인의 인생을 이처럼 빛나게 하는 일도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은 대립된 관계가 아니다. 빠롤은 결국 랑그가 된다. 요즘 세상에서 ‘빠롤’을 조금 더 쉬운 언어로 표현하자면 ‘개성’ 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 우리 모두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나의 빠롤에 의심하지 말지어다. 내가 가진 언어는 무엇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은 무엇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행위는 무엇인가. 당신의 생각이 가진 소립자와 미립자, 중성자가 어쩌면 우주의 규칙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