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것은 무슨 헛소리나 하지 말게. 눈을 비비고 귀를 씻어봐도 마찬 가지일세, 아, 눈을 씻고 귀를 후벼봐도 라고 해야 맞는 말이려나? 어쨌거나 너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건 내가 맞네. 내가 나지 그럼 누구겠는가. 자네는 구두를 한 켤레 사려고 했을 것이야. 아마도 저번에 본 영화 <킹스맨>이 마음에 들었나보지. 거기서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나. 아니아니,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말고. 이거 말일세. “옥스포드, 노 브로그.” 말마따나 올웨이스 클래식 아니겠는가. 아 그런데 자네 클래식이 뭔지 알긴 아나? 클래애시크. 아, 그런데 그 영화 보고 구두를 사려고 한 건 아니라고? 그럼 이유가 뭔가? 요즘 젊은이들은 죄다 그 영화를 보고 클래식에 꽂히던데. 뭐, 왜, 내가 옥스퍼드 노 브로그가 아니라서 클래식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어 뵈나? 그건 문제가 안돼 문제가. 좌우간에 구두를 왜 고르러 왔다고? 그냥 여러 가지 이유로? 뭐 그딴 이유가 다 있나. 정장을 성인이 됐다고 무작정 사러 가는거랑 다를 게 뭔가. 내가 아는 젊은이가 딱 그랬네. 20살이 되니까 그저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어머니가 정장 하나는 있어야 된다고 해서 사러 간 거야. 근데 문제는 그 친구는 아버지가 안 계셨지. 결국 남자 정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어머니랑 정장을 사러 갔단 말이야. 정작 자기 자신은 정장을 딱히 입을 일도 없는데 말일세. 어머니가 남자 정장에 대해 뭘 알긴 알겠나. 직원이 추천하는데로 어울리지 않는 스트라이프에 피크드 라펠 같이 부담스러운 자켓의 정장을 사고 말았지. 뭐 나름대로 몇 년은 장례식 갈 때나 요긴하게 쓰긴 했지만 그게 뭐 사실 장례식 갈 때 말고 멋을 내기에 적당하진 않았지. 후회 속에서 그 정장은 어느 새벽 의류수거함으로 들어갔지. 뭐 그것도 아냐? 진짜 필요해서? 아, 자네 아르바이트 구했나? 왜 요즘에 어떤 일자리는 정장에 구두를 꼭 신어야 된다더구만. 그 은행에 청원 경찰인가 뭔가랑 뭐 좌우간 어디 경호 비슷한 일자리는 죄다 정장에 구두가 필수라지 아마. 근데 그게 또 자비로 부담해야 된다니 그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겠나. 가만 생각해보면 일 하려고 정장을 산다는 게 이게 참. 나로선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일세. 아 그나저나 클래식한 차림이 꼭 뭔가 계급을 나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네. 자네가 혹 그런 오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영국에서는 정장이 오히려 계급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정장이 보편화되지 않는 나라에서야 정장 = 상류 계급 이지만, 오히려 신분제가 아직도 있는 영국에서는 모두가 정장을 입고 사무실과 일상에서 만나기 때문에 사회적인 계급이란 게 일터, 그리고 일상에서는 희석된다는 의미가 있지. 이거 나름 멋진 의미 아닌가? 정장이란게 원래 전쟁터에서 싸우는 기사들의 갑옷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면 더 의미가 남다를 걸세. 그리고 구두란것도 지금이야 가죽이 뭐 불편하고 고급스럽기만 한 소재에 바닥은 쿠션도 없고 뭐 그렇게 느끼겠지만, 원래 발목까지 오는 가죽 부츠는 사냥꾼들의 전유물이었단 말이야. 늪지를 건너고 습지를 종횡하며 숨죽여 사냥감을 밤새 추적하는, 터프함의 대명사 아니겠는가? 거기에 브로그가 왜 있겠는가? 바로 좀더 유의미한 통풍을 위해서지 이 사람아. 사실상 브로그가 있는 구두라는 건 그만큼의 터프함과 스포티함을 의미한다는 걸세. 그저 드레스업만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이 말이야. 아 그리고 요즘엔 기술이 좋아져서 창도 튼튼하고 쿠션도 푹신푹신하고 가죽도 얼마나 좋은지 이거 이런 색깔이 예전엔 나오지를 못했다고. 뭐, 한국인이라서 발이 불편? 에라이 이 사람이. 아 성수동에 수제화 골목 안가봤어? 거기 장인들이 몇십년 넘게 한국인 발에 맞춰서 구두만 만들던 사람들이야. 당연히 한국 사람 족형 정도는 이미 우리 기성화에도 다 적용이 되어 있지. 거 불편하면 이걸 신고 다니겠어? 거기다 비즈니스다 뭐다 구두 신는 사람들이 은근히 걸을 일이 많은데 이거 불편하면 진작에 아무도 안 신지. 그리고 내 얘기했잖아, 아 기능이 좋다니까. 이게 옛날 그대로 그 신이 아니에요 기능이 요즘 신발이야. 뭐? 비싸다고? 젊은 양반이 가격은 물어보지도 않고 비싸다 그러면 어떡하나? 뭐? 헛것이 보이다가 이젠 대화까지 하다보니 귀신에 홀린거 같다고? 응? 입으로 말은 안했지만 생각만 했는데 어찌 알았냐고? 그럼 내가 아까 말했지. 헛게 아니라니까. 나? 나는 구두지. 너가 신지 않으면 난 영원히 너의 발가락 앞에서 신기기를 기다릴거야. 하지만 한번 신게 되면 아마 영원히 벗을 일이 없을지도 몰라. 눈을 씻고 귀를 후벼봐도 마찬가지일거야. 아, 눈을 비비고 귀를 씻어봐도 마찬가지일거고 말이야. 아마 영원히 나를 벗을 수 없을 거야. 나는 너, 너는 나. 바닥에 앉아야 하는 삼겹살 집에서 고단한 회식을 할 때에나 잠시 나를 벗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회식이 끝나기 무섭게 너는 발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나를 꺾어신고 계산대로 제일 먼저 달려갈거야. 집에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이기 위해서만 너는 잠시 나를 벗어놓을 수 있을거야. 하지만 눈을 감고 뜨면 다시 제일 먼저 나를 신으러 오겠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자넨 나를 신은 순간 벗을 수가 없어. 벗어도 벗은 게 아닐 테야. 아마 죽으면 벗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모르지 자네의 가족들이 나를 자네의 발에 신겨 같이 묻을지도. 농담일세, 그게 싫으면 그냥 화장을 시켜달라고 하게. 그게 싫다면 나를 신을 일이 없으면 되겠지. 글쎄, 모르겠다고? 쭉 모르고 살아오지 않았나? 자네가 언제는 나를 신을 거란 걸 생각하고 살았던가? 아, 근데 그거 아나? 난 이미 어느샌가 자네에게 신겨 있네만. 우리 앞으로 잘 한번 지내보세. 벗고 싶으면 빨간 구두 라는 동화 알지? 그거 한번 읽고 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