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물건들처럼, 신발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나 편하자고 신는 거 아닌가. 가볍고 부드럽게 달리고 싶을 땐 러닝화를, 집 앞 슈퍼에 라면 사러 갈 땐 슬리퍼를, 바다나 계곡에선 아쿠아 슈즈를 신는 것처럼.

그런데 어쩐지, 의례적으로 구두만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소비되어온 신발인 것만 같다. 요즘은 패션에 정해진 규칙이 없다곤 하지만, 결혼식의 축하나 장례식의 애도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구두가 어울린다. 취직을 위한 최종 면접 자리에 빈티지한 스니커즈나 슬리퍼를 신고 가는 얼빠진 취준생이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개인적인 만남이 아니라 업무를 위한 미팅일 때에는 역시 구두가 어울린다. 날카로운 세파와 굴욕의 길을 걸어 가정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굽 닳은 신발은 늘 구두였다. 박목월의 시 <가정>에 나오는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의 그 신발도 아마 구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구두는 순전히 나를 위한 구두라기보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또는 어떤 사회적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선택한 구두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그 구두를 신고서 삶의 과정을 겪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자신을 보살피지 않으면서 남을 위하는 것은 미련이거나 만용이거나 허세다. 우리가 선택하는 여느 물건들처럼, 구두도 우선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의 도전, 나의 실패를 위한 여정에 내가 원치 않는 구두를 신고 걸을 수는 없다.

당신이 아무리 자유분방한 패셔니스타라고 해도, 우리 삶에 ‘반드시 구두여야만 하는 날’은 오고야 만다. ‘기왕이면 구두인 날’도 있고, ‘괜히 구두이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들은 아마도, 평소보다 조금 더 중요하거나 설레거나 기분 좋은 날일 것이다. 그러니까 구두를 신는다는 건 정말이지 ‘나를 위한 일’이 확실하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두 한 켤레를 고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나를 위한 구두’를 고르는 일. 때때로 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온전히 당신을 위한 구두를 신고서 어떤 길이라도 나아가길. 구두 가죽의 주름이 당신의 웃는 얼굴을 닮아가길. 끝내 구두가 당신을 응원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