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나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라는 만화책을 참 좋아한다. 동서양의 온갖 마녀 전설을 모아 기묘하게 이어지는 기묘한 단편들의 엮음으로 만들어낸 작품. 중세의 유럽에서든,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든, 혹은 동남아시아의 습하고 무더운 정글 안에서든, 마녀들은 존재한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 경외로움과 동시에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테드 프래쳇과 닐 게이먼의 <멋진 징조들> 이라는 소설에서도 천사와 악마, 마녀와 마법이 주 소재다. 이 소설에는 미래를 예언하는 마녀가 하나 나오는데, 그녀의 선조 역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었다. 헌데 그 선조는 마녀로 몰려 중세 시대에 화형을 당했는데 이유가 황당하다. 그녀는 중세의 영국에 살다가 미래를 보게 됐는데, 그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달리기를 하는 게 좋다’ 면서 뜬금없이 마을을 한바퀴 뛰어다닌다거나, ‘질병을 예방하려면 물은 끓여 먹고 손과 몸은 자주 씻어야 한다’ 고 이야기하는 등 당시의 시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다녔다. 이웃에 대한 친절과 배려로 시작된 이런 행동은 그녀가 마녀로 몰리기 충분했고, 미래를 보았던 이 친절한 여자는 결국 불에 타 화형당했다.

최근에 한국 영화 하나가 개봉했는데 제목이 아주 노골적으로 <마녀> 였다. 헌데 일단 영화의 수준을 떠나서 한국 사람들은 ‘마녀’ 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굳이 그런 것까지 따지진 않더라도 <악녀> 라는 영화에서도 정작 제대로 된 ‘악녀’는 단 한 명도 나오지가 않았던 것이 한국 영화 창작자들의 전반적인 수준을 증명하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마녀>에도 제대로 된 ‘마녀’는 단 한 명도 나오지가 않았다.

다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마녀>로 돌아가면, 세계 곳곳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마녀로 취급받았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일본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때로는 중앙아시아의 무당들이, 중세 유럽의 약초꾼들이, 주로 그렇게 마녀로 취급당해왔다. 중요한 것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해석하는 마녀의 본질과 본모습인데, ‘대자연’과 소통하며 인간과 대자연을 이어주는 매개자로서, 보통 무당이자 자연의 수호자이며 동시에 자연의 가르침을 받는 인도자의 모습으로 나온다. 대자연이 순응과 두려움의 대상이던 시절에도 존경과 동시에 경외감과 두려움의 존재들이었던 ‘마녀’들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으로 바뀐 뒤에는 더더욱 멸시와 공격의 대상이 된다.

재밌는 것은 일본에서 ‘마법’ 이나 ‘마녀’ 혹은 ‘마법사’ 나 ‘초자연적인 세계’ 등을 다루는 창작물들이 굉장히 많고 또 활발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서브컬쳐 전반에 걸친 풍토를 떠나서, 일본인들은 감성자체가 초자연적인 세계 자체에 대해 개방적이고 생활에서 밀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종교 분포도를 보면 무교가 거의 90%에 달하고 기독교의 점유율은 거의 1%가 될까말까하다. 사실 이 무교라는 것에서는 종교가 없다기보다도 오히려 여러 종교에 개방적이면서도 특정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다신교적인 면을 나타낸다.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토’ 를 살펴보면 이런 면이 잘 나타나는데, 특정 지역마다 지역의 전설과 자연 환경에 관련된 신앙이 있고, 역시 각 지역마다 사당과 신관들이 모시는 신앙이 전부 다르다. 자연 환경에 대한, 거의 정령 숭배와 신앙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많다.

일본에서 과거 원나라의 침공이 태풍 때문에 좌절되자 ‘신의 바람’이 불었다며 ‘카미카제’라 이름 붙였던 것, 그리고 그 카미카제라는 이름을 이길 수 없는 전쟁의 막바지 자살 특공대에 붙였던 것에서 이들의 사고 체계를 의미심장하게 엿볼수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바람에조차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또 실제로 받아들여 믿음의 일부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들의 정령신앙적인 모습은 다른 데서도 엿볼수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베인 상처를 ‘바람이 베고 갔다’ 는 의미에서 카마이타치라고 불렀는데, 사실 이 ‘카마이타치’는 3마리가 몰려 다니는 앞발이 낫으로 되어있는 족제비 요괴를 부르는 이름으로써 바람이 심한 날 지나가는 생물이나 물체를 넘어뜨린뒤 베고, 치료하는 약을 주는 조금은 귀엽고 어처구니없는 요괴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자연의 현상으로, 또는 동물을 토대로 한 요괴에 대한 현상으로 해석하고, 또 그냥 믿어버리는 감성은 한순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폐쇄적인 섬나라에서, 태풍과 지진이 잦았던 나라에서, 동물과 대자연, 그리고 밤의 어둠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는 이야기를 낳고 신앙을 낳았을 것이다. 이런 현실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흐릿함이 일본인들 특유의 정령적인 감수성을 기른 것이다.

그러니 일본처럼 같은 섬나라이면서, 동시에 거센 파도와 비바람이라는 거친 자연 환경이라는 요소를 공유하는 영국에서 ‘마법’과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태동하고 유행하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신화에서 아서왕은 돌에 단단히 박힌 마법검을 뽑음으로서 왕의 자격을 증명했고, 아서왕의 옆에는 ‘멀린’ 이라는 대 마법사가 있었다.(한켠에서는 ‘아서왕’을 로마에서 건너온 속주의 지배자 혹은 군단장 정도의 인물로, ‘멀린’을 영국 섬 본토의 스톤헨지로 대표되는 정령적 신앙을 공유하던 원시적 종족들의 족장이자 협력자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로 중세에 가장 악명 높은 마녀 사냥이 일어났던 곳 중에 한곳도 영국이며,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희곡<맥베스>에서처럼 난세에 왕에게 또는 권력자에게 마녀들이 나타나 예언과 동시에 악마적인 힘을 건네줬다는 전설들이 여전히 공존했던 곳이 영국이다.

물과 바람이 많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하며, 초자연적인 것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곳. 이런 곳에서 주로 정령적인 신앙과 ‘마녀’들이 살았다. 한국에서 무속, 굿으로 유명한 지역을 봐도 그러하다. 진도로 대표되는 서해안, 강릉으로 대표되는 동해안, 제주도의 굿까지 앞서 말한 요소들이 포함되는 지역들에서 무속신앙과 특히 세습굿이 대를 이어서 전수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연환경에 대한 공포보다는, 침략 전쟁,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 등이 막심했고(덕분에 호랑이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로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여기거나 옛 이야기에 인격체로 등장시키는 등의 신앙이 나타났다. 신내림을 받는 무당들이 신을 부를 때 대부분 ‘장군님’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조선의 경우 500년이 넘는 안정기를 거치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 역시 점점 희미해져갔다. 청나라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해 전쟁을 벌이는 중에서도 조선 왕조의 조정이 빼먹지 않고 했던 일이 바로 정초에 명나라의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는 신앙 행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경외심과 공포를 가졌던 존재가 초자연적인 것에서 극히 현실적인 정치적 대상으로 옮겨갔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을, 한국을 지배했던 유교사상의 경우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초 현세 지향적인 사상이었기에, 묘지를 쓰고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정도의 신앙 행위들도 현세를 위한 활동이었을 뿐이었다. 일본이나 영국처럼 진지하게 현실과 귀신의 세계들이 공존한다거나 혼재한다는 생각따위는 옅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들이 영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정령적인 신앙체계와 믿음, 초자연적인 마법과 마녀에 대한 감수성과 이해도 자체가 낮은 것은 당연한 일인 것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삶과 죽음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닌 희미하게 혼재하고 때로는 공존한다는 믿음, 초자연적인 것이 현실에서 때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수성. 이것들이 꼭 나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의 가치체계와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후지다고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죽어서의 명예가 아닌, 현실에서 뭔가가 이루어지는 것을 끝끝내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한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물질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집착을 통한 개인의 성장욕구.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짧은 압축 성장이 가능했던 것도 일부분 맞다.

그러나 그렇기에 반작용도 있다. 현실세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풀어줄 체계와 시스템이 아직 한국의 현실세계에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무교 90%에 달하는 일본인들보다도 종교를 가진 70% 이상 비율의 한국인들이 말해주듯, 오히려 한국인들은 현실세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지고 초자연적인 세계로 도피하곤 한다. 물질세계의 스트레스를 현실에서 감당하지 못하니 정신세계로 가서 풀려는 시도로도 해석 가능하다. 해가 달라질 때마다 매번 정신세계에서 한가지 키워드가 정해져서 열풍이 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녁이 있는 삶’, ‘힐링’, ‘YOLO’, ’워라밸‘ 등 한번씩 대한민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키워드들 모두가 특정한 정신적 체계로 현실의 스트레스를 해소, 아니 ‘해결’하려는 발버둥이었다.

비록 정치 경제적인 상황들을 다각도로 분석하지 않고 무작정 일면만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나, 아시아의 종교 국가인 부탄이 세계 행복지수 1위인 것이나,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이 생각외로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어쩌면 현실과 초자연적인 대자연의 품이 명확해지고 또 멀어지면 질수록, 인간은 하나를 얻으며 동시에 하나를 잃어버리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자연주의를 예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는 도시를 벗어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이다. 평생 살아야 한다면 난 결코 시골이나 대자연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음 일화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동남아시아의 메콩강은 거대한 강이다. 속과 끝을 알 수 없는 울창한 정글과 습하디 습한 기온, 그리고 마치 바다처럼 흐르는 거대한 메콩강. 이 메콩강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희미하게 가르며 현실과 초자연의 세계를 분리하면서도 동시에 이어주는 매개체로 지역 부족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바다를 건너야 하는 차원이지만, 인도네시아 옆에 붙어있는 뉴기니 역시 이런 메콩강의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지역 중 하나이다. 특히 뉴기니의 가후쿠가마 부족의 경우 특이한 에피소드가 전해져온다. 뉴기니에 온 선교사들은 가후쿠가마 부족에게 축구를 가르쳐줬다. 그리고 가후쿠가마 부족들은 이 축구를 자기들에 맞게 룰을 변경시켰다. 그들은 축구의 스코어가 90분이 지난 이후 서로 완전한 동점이 될 때까지 몇날 몇일이고 축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신령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 문명 속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참고하고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도시들은 이미 밤과 낮의 경계가 희미하다. 아침에 출근하는 자와 밤에 퇴근하는 자들은 마찬가지 자는지 깼는지 알 수가 없다. 술이 나를 먹는지 내가 술을 먹는지 모른다는 말은 농담 수준이다.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현실을 다시 초자연적인 세계와 희미하게 이어줄 ‘마녀’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들일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마녀’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