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손흥민 선수 공을 놓쳤어요! 저건 공이 잘못한 거죠. 우리 완벽한 손흥민 선수가 저럴 리 없어요!”

아시안 게임 축구 경기를 보다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수박을 뿜을뻔했다.

분명, 손흥민 선수의 실수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그 날 따라 볼컨트롤이 좋지 않았다. 특별 게스트였던 해설위원은 사뭇 진지했다. 그래서 더 웃겼는지도 모른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옆의 아나운서와 또 다른 해설위원도 피식하며 반응했다.

“그러니까, 공이… 잘못한 거라고요? 하하… 하아아”


끝내 수박을 뿜지 않은 건, 이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였다.

순간 떠오른 직장에서의 기억들이 얼굴 근육을 굳게 했고, 웃음기를 쏙 뺐으며, 내 고개를 서서히 끄덕이게 했다.

직장에선 좋지 않은 성과를 두고, 다른 평가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 저 친구가 왜 그러지? 저럴 친구가 아닌데. 분명 사업환경이 안 좋았거나, 무슨 Issue가 있을 거야!”

“하! 저 친구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어째 불안 불안했다.”

전자는 ‘이미지’가 좋은 경우다. ‘후자’는 당연히 ‘이미지’가 안 좋은 경우다. 물론, 단순히 이미지가 좋고, 안 좋고를 양분해서 판단할 순 없다. 이미지가 좋으면서 일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일은 그저 그런데 이미지가 좋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미지는 안 좋은데 일은 잘하는 사람, 일도 못하고 이미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될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란 속담이 있다. 그리고 우린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이것은 ‘기억’과 ‘감정’이 관계되어 있다. 우리 뇌 속에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는 ‘편도핵’과 바로 붙어 있는데, ‘편도핵’은 감정을 관장한다. 공식이 성립된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감정’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단편 단편 심어진 기억과 감정일 수 있고, 그냥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이나 그날의 감정에 따른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미지’를 좋게 하는 것 따위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어떻게 하기보단, 상대방의 기억과 감정에 따라 나의 ‘이미지’는 형성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난, 오늘도 좋은 ‘이미지’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방법은 변했다. 예전엔 ‘드러내고자’했던 것이 컸지만, 요즘은 ‘드러나는’방향을 꾀한다. 드러내는데 치중하다 보면,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고 조급해진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을 찬찬히 해내고 내실을 다지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이미지’는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기회를 봐서 드러내야 하는 경우는 분명 있다. 직장인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방법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괜히 좋은 사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은 아주 쉽게 갈린다. 이미지도 그와 궤를 함께 한다. 그러니까, 내 이미지가 누군가에게 잘못 박혀 있다고 해서 억울해할 필요 없다. 나 때문에 억울할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이미지’를 서럽도록 갈망한다. 또 누군가는 나의 ‘이미지’를 갈구한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직장엔 ‘이미지’가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있다. 분명한 건, 직장에서 ‘이미지’는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성과와 관계없이) 승진과 인센티브가 결정되고, 누군가는 역량과 관계없이 승승장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지’는 절대 ‘허상’이 아니다. 적어도 직장에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