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멜처 라는 사람이 있다.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에 대한 칼럼을 쓰고 경기마다 별점을 매기는 걸로 유명한 칼럼니스트이다. 이 사람이 발행하는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는 본인의 표현으로는 ‘그저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이미 프로레슬링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미 독보적인 대기업인 WWE 조차 데이브 멜처의 경기당 별점을 은근히 신경 쓸 정도니 업계에서 이 사람의 신뢰도가 어느 정돈지를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 데이브 멜처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레슬러는 누구일까? 미국사람이니 당연히 미국 출신 슈퍼스타를 좋아할 것 같지만 데이브 멜처는 자타가 공인하는 타나하시 히로시의 팬이다. 이 사람의 타나하시 사랑은 팬심이나 칼럼니스트로서의 찬사를 넘어서 진짜로 ‘사랑’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데이브 멜천지 뭔지 하는 인간 얘기로 시작해서 웬 프로레슬링으로 빠지더니 이름도 처음 들어본 일본의 프로레슬러 이야기로 빠지는데 제목에는 게임회사인 BLIZZARD 가 들어간게 보통 수상한 게 아니겠지만,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타나하시 히로시는 일본의 프로레슬러다.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슈퍼스타고, 현재 신일본 프로레슬링(약칭 NJPW 혹은 신일본)이 WWE에 이어 세계 2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발판을 놓은 인물이다. 사실 이 설명 하나만으로도 타나하시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NJPW가 세계 제 2위의 프로레슬링 대기업이 된게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는 설명이 된다. 물론 그게 왜 대단한지 전혀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타나하시는 대학시절부터 프로레슬러를 지망했지만 1998년에야 간신히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합격했고,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오란 소리에 99년이 되어서야 신일본에 입문했다. 문제는 그리고 나서 펼쳐진 시대가 바로 2000년대라는 것이었다. 2000년대는 그야말로 프로레슬링의 암흑기였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는 K-1 그리고 PRIDE 라는 양대 브랜드를 앞세운 종합격투기의 인기가 그야말로 광풍을 일으키며 열도를 휩쓰는 중이었다. 당시의 K-1과 PRIDE는 일본을 넘어서서 전세계로 봐도 독보적인 단체들이었기에, 더더군다나 일본 내의 프로레슬링 단체들은 이들에 맞설 수가 없었다. 이미 젊은 층들은 격투기로 시청률이며 팬층이 거의 옮겨간 상태였고, 프로레슬링은 그야말로 소수의 매니아들만이 시청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때 일본내의 프로레슬링 단체들도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된다. 이들은 격투기와 경쟁하기 위해서 크게 두 가지 길을 선택한다. 하나는 이른바 ‘왕도’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었는데, 짜고한다는 프로레슬링의 특성을 살려 실제 격투기에서는 감히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기술들을 무차별적으로 주고받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강도가 정말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라 ‘저러고도 사람이 안 죽나?’ 싶은 정도가 아니면 쳐주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비록 부드러운 링매트라곤 하지만 사람을 거꾸로 들어올려서 머리부터 수직으로 링바닥에 내리꽂는 이른바 ‘수직낙하식’ 기술에, 1m가 넘는 높이에서 아무런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장외 바닥으로 사람을 던지는 식이었다. 프로레슬링 매니아들은 이 격렬함에 환호했다. 그러나 이는 2009년에 미사와 미츠하루라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거물이 링에서 고각도 백드롭을 맞고 경추 신경이 절단, 그대로 사망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미사와 역시 시대를 풍미했던 레슬러로서, 또 프로레슬링의 암흑기를 ‘왕도’로 헤쳐나가던 사람이었다. ‘왕도’를 택한 프로레슬링은 사실상 이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미사와는 숱한 명경기를 이끌어냈던 전세계 프로레슬링 역사상 첫손에 꼽히는 프로레슬러 중 하나이다.)

왕도의 반대편엔 타나하시가 몸담고 있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이른바 ‘스트롱 스타일’이 있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인 역도산에서 시작해 안토니오 이노키로 이어지는 이른바 ‘프로레슬링 최강론’에 입각한, 일반인이 보기엔 조금 어리둥절한 면이 있는 방식이었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당시나 지금이나 신일본의 왕이나 다름없었고, 특유의 근성론에 입각해서 실제 싸움에 가까운 프로레슬링을 추구했다. 본인 스스로 무하마드 알리와 최초의 이종격투를 벌일 정도(내용과 결과는 쓰레기 수준이지만)였으니, 신일본의 경기들은 이름만 프로레슬링이지 거의 쇼맨십이 약간 첨가된 격투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각본이 있고, 절대 실제 싸움은 아니란 것이 넘어설 수 없는 모순점이었다. 킥과 펀치들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고, 조르고 꺾는 공방전은 날카롭지 않았다. 신일본 출신으로 수많은 프로레슬러들이 ‘실제로’ 이종격투기 무대에 도전도 했지만 결과는 복날 개처럼 두드려 맞는 처참함이 반복됐다. 미안하지만 프로레슬러는 실제로 전혀 강하지 않다는 것만 계속해서 증명할 뿐이었다. 팬층은 계속해서 이탈했고, 이런 신일본의 스트롱 스타일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이때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얼마나 막장이었냐면, 위에 언급한 데이브 멜처가 신일본이 하는 건 프로레슬링도 아니라며 경기에 별점조차도 매기지 않을 정도였다. (전세계 인디 프로레슬링 경기까지 어지간하면 전부 챙겨보는 그 데이브 멜처가 신일본의 경기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0년대 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렇게 스스로를 좀먹어가며 파멸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암흑의 200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해 곧 에이스로 자리잡은 타나하시 히로시가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타나하시는 본격적으로 단체의 중추로 자리잡는 2000년대 중반부터, 한가지 변혁을 시도한다. 바로 대놓고 ‘스트롱 스타일’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도대체 그놈의 스트롱 스타일이 뭡니까?” 라고 반문할 정도(누구도 정확히 스트롱 스타일이 뭐다, 라고 대답한 사람은 없었다.)였다. 그는 자신은 절대 역도산과 이노키의 투혼을 계승하지 않으며, 신일본 도장에 있는 이노키 사진도 떼버렸노라고 얘기했다. 단체를 넘어서 일본 프로레슬링 업계 전반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게 아무리 전통이라 하더라도 아예 박살내버리겠다는 태도로 임한 것이다.

타나하시는 타겟을 기존의 전통적인 팬층과 매니아들에서부터 여성과 어린아이로 옮겼다. 싸움같아 보이는 방식을 버리고 쇼맨십을 강조했고, 캐릭터성을 강조했다. 매번 경기가 끝나면 에어기타 쇼를 펼치며 환호를 유도했다. 2시간씩만 자면서도 이를 악물고 팬서비스와 홍보에 열중했다. 기존 팬층이 격렬히 반발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타나하시가 새로운 기틀을 세우고 버티고 버티던 신일본은 결국 2012년부터 인수합병, 오카다 카즈치카와의 대립이 엄청난 인기를 얻는 등 호재가 겹쳐 V자 반등에 성공하고, 세계 2위의 프로레슬링 단체로 우뚝서게 된다. 한 때는 일본 구석에서 곧 망하니 마니 하던 회사를 근본부터 뜯어고쳐서 세계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이제 데이브 멜처는 타나하시를 최고의 프로레슬러로 꼽는걸 넘어서서 한때 보고도 별점조차 주지 않던 신일본의 경기들을 WWE보다도 높은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바람은 비단 신일본만의 것은 아니었다. 신일본이 업계 2위로 올라선 지금, 당연하게도 업계 1위를 고수하는 WWE 역시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이었다. 여자 프로레슬러들이 비키니 입고 노출하며 아이캔디 역할만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위민스 챔피언십이란 것을 새롭게 만들었고, 인디 단체들에서 활동하던 레슬러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던 과거에서 벗어나 아예 NXT 라는 산하 단체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전세계의 재능있는 프로레슬러들을 쓸어담고 있다. 아예 프로레슬러를 양성하는 학교 같은 시설마저 만들어 관리를 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이제는 레슬러들의 마약 및 스테로이드 오남용 문제와 한 미치광이 레슬러가 일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사장이었던 빈스 맥마흔이 청문회까지 불려가며 단체가 없어질 뻔했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WWE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며 난치병 어린아이나 왕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잡았다. 당장 슈퍼스타인 존 시나는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최다 출연자인 수준이다.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WWE, 국적은 다르고 계기는 다르지만 두 프로레슬링 단체는 재밌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뭣보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통과의 단절이란 평을 받더라도 과거에 안주하기보단 쇄신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신일본의 타나하시가 맞딱뜨렸던 올드팬들과 선배 레슬러들의 반발은 말할 것도 없고, WWE 조차도 당장에 가장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막장드라마같은 각본이 난무하던 이른바 애티튜드 시대(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때가 진짜 프로레슬링이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쇄신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폐업했거나 구멍가게 수준으로 전락했을 것이고, WWE는 아마 단체가 아예 증발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뼈를 깎는 쇄신이, 결국 이들을 살린 것이다.

최근 내 기준으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역시 게임회사인 블리자드의 행보였다.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오버워치 등 더 말해봤자 입아픈 전설적인 게임들을 개발한 회사이자, 게임의 역사를 바꿨다고 말해도 무방한 회사이다. 지금 말한 게임들 중 하나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헌데 이 블리자드가 최근에 거하게 한건을 해냈다. 물론 좋은쪽은 아니다. 자사가 주최하는 게임페스티벌이자 자사홍보행사인 블리즈컨에서 오랜 프랜차이즈이자 그야말로 전설적 게임 중 하나인 디아블로 시리즈의 신작을 발표했는데, 이게 게이머들의 엄청난 반발을 산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신일본과 WWE가 마주쳤던 전통적 팬들의 반발처럼 느껴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블리자드는 신작 디아블로는 (게이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모바일로 나올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PC나 다른 플랫폼으로는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디아블로의 모바일 버전의 공동 개발사는 중국의 넷이즈로, 문제는 이 넷이즈가 이미 디아블로의 짝퉁 게임을 만들었던 전력이 있는 회사라는 것이다. 게이머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던건 바로 이 두가지 지점이다. 블리자드가 업계의 탑으로 올라섰던 이유는 단 하나, 장인정신이었다. 모든 게임을 만드는 데 있어서 블리자드는 본인들이 만족하는 지점이 아니면 타협을 하지 않았고, 실제로 게임개발에 5년 6년이 걸리는 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놓는 게임들이 탁월했기에 현재에 이른 것이었다. 헌데 오래된 프랜차이즈 IP를 가지고 새로운 혁신도 아닌 모바일 게임(모바일 시장이 초월적으로 커진 것은 둘째치고, 모바일 기기의 한계상 게임의 표현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인것도 모자라서, 장인정신의 상징을 저버리듯 자사의 짝퉁을 개발했던 회사와의 협력이라니.

이미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옛날의 그 블리자드가 아니다’ 라며 등을 돌렸고, 안팎에서 현업에 있는 개발자들의 증언과 내부고발까지 이어지며 블리자드는 내홍을 겪고 있다. 단순히 전통적인 팬층의 반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블리자드의 시총은 블리즈컨에서 디아블로 모바일을 발표한 순간 5조원이 증발했고, 현재는 주가 폭락이 이어져 17조가 증발했다. 단순 비교하자면 코스닥으로 치면 최고의 시가총액을 가진 회사가 셀트리온헬스케어의 11조, 코스피로 치면 현대모비스, 한국전력, 삼성 SDI 가 각 17,18조 규모를 가지고 있으니 이 대기업들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는 뜻이다.

게임과 프로레슬링이 언뜻 전혀 다른 업계같아 보이지만 고객들에게 꿈을 판다는 점에서는 사실 동일한 구석이 있다. 게임과 프로레슬링을 동시에 좋아하는 인구도 살펴보면 아마 꽤 될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쇄신과 변화, 혁신을 통해서 다시금 업계의 최고로 거듭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전통은 물론이고 전혀 새로운 고객층을 찾아내지도 어필하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침몰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다. 지금 블리자드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벌써 황금기의 블리자드를 이끌었던 멤버들이 퇴사당하고, 액티비전과의 합병 과정에서 블리자드는 이미 이름만 남고 액티비전의 횡포만이 남았다는 고발들이 줄을 잇고 있다. 블리자드에게 과연 WWE처럼 새로운 팬층을 찾아내고 발굴해내고 만족시킬만한 비전이 있는지, 그리고 신일본의 타나하시처럼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 도려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열정이 있는지, 날아간 시총 17조를 회복하고 블리자드가 다시 업계의 1위로 올라설수 있을지가 궁금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