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란 이름을 뒤집어쓰다

 

“인생은 역할극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탈’을 썼다. 이 말은 긍정적으로 쓰이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이 암묵적 규정 안에서 행하는 것, 바로 ‘역할’이다. 그러니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역할극’에 임하는 것이다. 아기, 어린이, 학생, 아들, 딸, 형, 동생, 어른, 남자, 여자, 부모, 선배, 후배 등은 인생사에서 우리들이 거쳤거나, 거치고 있거나, 거쳐야 할 ‘역할’ 들이다. 우리의 삶이 영화나 연극, 또는 소설에 자주 비유되는 이유다. 결국, 각 ‘역할’들의 아웅다웅함이 이야기를 만들어 기승전결을 향해가는 것이, 우리가 태어나서 죽어가는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쓰고 또 쓰고”

사실, 어렸을 땐 이런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인지 하기 어려운 때.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들은 ‘역할’이란 것을 인지하고, ‘역할’을 스스로 찾아간다. 게다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하지 않는 ‘역할’을 갖게 되며 버거워한다. 인생의 맛이 쓴 가장 큰 이유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이러한 ‘역할’을 ‘사회적 가면’이라 칭하고 ‘페르소나’란 용어를 차용했다. 더불어, 각각의 개인은 천 개 이상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했다. ‘인간의 탈’위에 우리는  천 개가 넘는 ‘역할의 가면’을 쓰고 또 쓰고 있는 모양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겨워하는 때는 이 ‘역할’이 급격히 바뀔 때다. 그리고, 그것은 원하지 않는 ‘역할’에 대한 부담감에 기인한다. 내가 원하는 가면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나에게 씌워지는 가면도 있다. 그러니 숨이 막힌다. 젊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초기에 삐걱대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의 가면이 급작스럽고, 낯설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던 남자와 여자란 역할에, 부부, 부모, 사위, 며느리라는 가면이 덧씌워지니 정신 차릴 겨를이 없다. 내가 맡은 역할도 잘해야 하고, 상대방도 존중해야 하는데 대개는 스스로는 돌아보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나무란다. 남자라면 학생의 역할을 하다가 갑자기 주어지는 군인이라는 역할도 큰 스트레스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하다가 목을 조르는 넥타이나, 타이트한 블라우스 정장을 입고 직업을 구걸해야 하는 순간엔 스스로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원하지 않은 역할과 가면들. 숨이 막히지만 써야만 하는 그것들. 다시, 인생이 쓴 이유다.

“아빠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인생이 역할극이고, 날이 갈수록 무언가를 계속 뒤집어써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많은 가면을 쓴 뒤였다. 그럼에도 난, ‘아빠’란 역할의 가면은 꼭 쓰고 싶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결핍’들이 나를 괴롭혔다. 경제적인 부분도 그랬지만, 정서적으로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의 부재. 그래서 나는 어서 내가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갈구했다. 그렇게 ‘아빠’가 되어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지 하는 소박한 생각. 물론, 요즘 ‘아빠’가 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해서 졸업해 직업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한 집에서 사는 것이 부모가 되는 일반적인 수순인데 그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는 ‘아빠’란 역할의 가면을 어쩔 수 없이 뒤집어썼다고 하면, 요즘은 선택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맘먹는다고 쉬이 될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운 좋게도 난 ‘아빠’가 되었다. ‘좋은’이란 수식어는 내게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볼 요량이다. 그런데, 이 아빠란 역할이 영 재미있고 즐겁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렇고, 말문이 터지고 어느새 논리가 생겨 질문과 함께 대화하는 것도 재미다. 내게 ‘결핍’이었던 것을 아이들에게 베풀면서 내 어린날의 상처가 치유되고 모자란 것들이 채워지는 느낌. 매일 아침이면 아이들을 꼭 안아주며 느끼는 그 온기가 내겐 삶의 희망이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많이 듣지 못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에게 슬쩍 건네는 이유다.

물론, 아이들이 자라 가면서 맞이해야 하는 서글픔도 대비해야 한다. 내 품을 떠날 것임이 분명하고, 포옹과 사랑한단 말을 거부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사랑을 찾아 부모를 잊기도 할 것이고, 저마다의 꿈이나 하고 싶은 일 때문에 가족을 후순위에 둘 것이 뻔하다. 내가 그래 봐서 안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란 역할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 가면을 벗지 않을 것이다. 아빠란 역할, 거기에 덧 씌워진 가장이라는 역할까지. 숨이 좀 막히고, 가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것을 지켜갈 것이다.

살아가면서 덧씌워지는 가면 중에는 이처럼 숨 막히고 무겁지만, 사랑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인간의 탈’을 쓴 존재의 숙명이라 해두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