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에 대하여

 

말은 시대를 여기도 하지만, 시대가 말을 낳기도 한다. 굳이 기술문명의 발달기준이 아니더라도 언어방식에 따라, 화법에 따라, 표현방식에 따라 시대를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문명발달사에 있어 가장 원천의 힘을 제공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최강자로 우뚝서게 된 이유도 바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조직’의 힘이었다. 

 

조직생활에서 ‘말’과 ‘언어’는 필수적이다. 장사는 혼자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비지니스는 절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원화를 이룬 사회와 조직이야말로 끝없이 꿈틀댄다. 그렇기에 많은 조직들도 변해가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끝없이 조직의 다양성을 키운다. 

 

이러한 다양성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간의 생각의 차이가 그래프처럼 눈에 띄는 것도 더더욱 아니기에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다양성은 존중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다양성, 즉 자신이 남과 다름 혹은 타인이 나와 다름을 알 수 있는 장치가 바로 인간의 언어다. 일수사견이라 했던가, 물을 보고도 생각은 다양하다. 하물며 똑같은 것을 보고도 어떻게 표현하느냐, 어떤 단어를 쓰느냐는 가지각색이 될 수 밖에 없다. 

 

생각은 언어방식의 중추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생각과 언어는 일정부분 동일성을 따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꿈’이다. 인간의 꿈은 이미지화 되어 나타나는 인간 무의식의 표현이자 언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질서적이며, 기승전결과 논리 따위는 전혀 없다. 그야말로 무의식 저변에서 뜬금없이 갑툭튀한 난해한 이미지들과 언어적 표상들만 가득할 뿐이다. 

 

인간의 언어에도 가끔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스스로의 통제영역을 넘어 갑툭튀 나도 모르게 흘러 나오는 말들 따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의 진심이라 단정짓고 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저 말의 본의는 무엇일까 따위의 질문들이 밤잠을 설치도록 만들기도 하고, 섣부른 내 판단에 하루종일 곡기를 끊을 정도의 식욕부진에 시달리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가 달라지는 사회환경과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현재의 두 다리는 덜덜 떨고 있다. 헬스장의 런닝머신을 속도 10이상으로 빠르게 뛰어야 하는데 발판의 표면이 불규칙 바운스로 통통 튀는 격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해도, 적잖이 신경쓰인다. 

 

한국사회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언어’ 에 있다. 다양성이 더욱 강조되지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처럼 많은 다양성을 부딪혀본 역사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사고, 비슷한 언어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어떤 보호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죄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을 나 자신으로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 중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나와 비슷한 언어방식을 가진 자들을 찾게 된다.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보고 있으면 또래집단이나 무리의 아이들의 언어습관이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고만고만한 아이들끼리 놀기 마련이고, 입이 거친 아이들은 거친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 물론 섞이기도 하지만, 정반대 성향의 아이들이 대화를 하다보면 둘 중 누군가는 한 사람을 닮아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예 인간관계가 끊어져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비슷한 언어, 비슷한 표현방식을 쓰는 사람들에 익숙하다. 그리고 더 편안해 한다. 하지만 조직생활에서 이 부분은 서로에게 많은 오해와 상처를 남긴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생각을 크게 탓하기 보다, 그 생각의 방식을 탓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왜 따위로 말을 하지?’ 라던지, ‘왜 그렇게 행동하지?’ 와 같은 외형에 더욱 집중한다. 사실 그건 알고보면 아무 문젯거리나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본의와 말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표현방식이 서툰 사람들은 선물을 주면서도 ‘오다 줏었다’ 며 머쓱해 한다. 언어는 사기꾼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100% 모두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떤 오해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 말인 즉슨, 상대의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쪽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말하는 쪽도 자기 스스로를 경계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스스로의 자아검열은 또다른 스트레스를 낳게 하고, 그 스트레스는 또 결국 누군가에게 예민함을 노출시킨다. 이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언어’의 기초에서 세워진 ‘조직’을 다운그레이드 시키는 현상을 낳게 된다. 

 

 

2019년은 예민함을 나의 특별함으로 포장하지 말자. 문제제기나 의견개진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내 다양성을 보장하는 길이 꼭 예민함으로 묻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예민함을 나로 지키는 무기쯤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의 총기사회 대신 예민함이라는 감정적 총을 항상 품고 산다. 그리고 상대의 가슴에 총상을 입힌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쿨한 인간의 디폴트 값은 예민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