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와 응원의 시대. 하지만 이제 조금 넘쳐나는 감도 없지 않다. 각종 매체와 소셜 미디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세지를 던진다. 결국 하고 있는 말은 ‘괜찮아, 잘될거야’라는 틀에 박힌 언어들이다. 진심을 담은 한 두마디의 위로가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흔하디 흔한 그저 위로뿐인 위로는 그저 ‘마약왕’ 이 팔아제낀 히로뽕에 불과하다. 그 순간만큼은, 아주 잠깐 자존감 충족이라는 이름의 쾌락이 솟아 오를테니 말이다. 

글쓴이 역시도 한때 페이스북 감성과 인스타 감성에 충만한 글들을 써내려 갈때가 있었다. 사람들을 위로한답시고, 응원한답시고 내가 가진 생각들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써온 글들에 줄줄이 달린 댓글들을 보면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은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의 그렇게 써내려 갔던 글들이 이제는 부끄럽다. 많은 이유들 중 첫번째는 나이가 들수록 발견되는 내 생각의 오류들 때문이고, 두번째는 내가 조금씩 변하듯이 세상도 조금씩 변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숙해진다. 10대의 내가 20대가 되면서 10대의 어리석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30대가 되면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내 20대 가치관에 쓴웃음을 지었다. 위로의 방식과 응원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10대 때 수많은 글들을 습작하며 사람들을 위로했던 방식과 20대 시절의 방식, 30대 초반의 방식은 현저히 달랐다. 어느 시절엔 까칠하게, 어떤 시절엔 부드럽게, 어떤 시절엔 날카롭게, 또 어떤 시절엔 눈물을 펑펑 쏟게, 그렇게 내 위로의 방식은 내 성장의 걸음에 발맞춰 변해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런 글들조차도, 먼 훗날이 되면 부끄러워질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몇 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내가 가진 삶의 가치관과 생각들이 언제나 내 인생에 동행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늘 ‘내가 하는 얘기는 정답이 아니겠지만’ 이라는 조건을 달아놓았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알게 모르게 그걸 무의식적으로 정답이라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정답은 아니겠지만이라는 말 속에 ‘공감해줘’ 내지는 ‘너에게도 이게 정답이었으면 좋겠어’ 라는 암묵적 강요가 깔려 있었다. 

세상은 바뀌고 하루하루 내 가치관들도 덩달아 바뀌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그건 내가 지금 나와 있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체류중인데 건설업을 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내 지인의 친오빠였는데, 며칠간 여러번 만나고 술도 나눠 마신 터였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남에서 그는 술에 거하게 취해 있었다. 술자리에서 잠시 나와 혼자 밖에 앉아 있으니, 그가 다가와 자신 속에 파묻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첫마디는 ‘작년 2018년은 정말 내 인생 최악의 한해’ 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주었다. 술 취한 사람의 술주정이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어떤 위로도 하지 않고서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공감한다는 듯한 작위적인 제스처나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보며 고개만 끄덕 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마쳤는지, 내게 올 2019년은 잘 지내보자며 하이 파이브를 건냈다. 나는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그러자 그가 대뜸 내게 말했다. 

“이유를 묻지 않아줘서 고맙다, 아무런 말도 안해줘서 고맙다.”

뜻밖의 말이었다. 사실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혀뿌리 쪽으로 곰실곰실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2019년의 새해 다짐은 ‘어설프게 위로하지 말것, 어설프게 조언하지 말것’ 이라는 다짐을 세우고서 며칠 지나지도 않기도 했던 터였다. 

“작가님의 글에 너무 감명 받았어요.”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힘이 솟아요.”

이런 댓글들 속에서만 파묻혀 있던 내게 ‘아무 말 없어 고맙다’는 말은 너무나 생소한 말이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내가 써내려왔던 어떤 글보다도 ‘침묵’의 단 한 순간이 오히려 어느 한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었음을 느꼈다. 

사실 우리는 ‘위로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위로’ 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강요를 하고 있으며, 상대가 허약한 틈을 틈타 내 생각을 전이 시키려 한다. 상대에게 힘을 주고 응원을 하는 것이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겠으나, 우리는 위로라는 이름의 너무나 무책임한 향정신성 의약품을 상대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슬픔은 온전히 그것을 느끼는 사람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슬픔을 느끼고, 극복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 몇마디로 너무나 쉽게 그 주인공 자리를 가로 채기 바쁘다. 그것이 따끔한 충고가 되었든 따뜻한 위로가 되었든, 상대의 슬픔에 대한 최고의 배려는 그저 존재일 뿐이다. 그가 힘들때마다 당신을 찾아온 것은 ‘그깟 말 한마디’ 듣자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