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질 수 있는 기쁨
  • 음반을 사는 사람들

종종 교보문고나 반디 앤 루니스 같은 대형서점에 간다. 당연히 책을 읽으려고 가는 것이긴 하지만, 막상 가보면 눈요기할 것들이 꽤 많다. 각종 문구류와 생활용품, 그리고 음반까지.

음반이라…

늘 그 음반 코너 앞에만 서면 이상한 위화감이 밀려든다. 그건 어쩌면 내가 열성적인 아이돌 삼촌 팬이 아닌 탓일 수도 있고, 획일적인 카세트테이프나 CD 패키징에만 익숙하던 내게 휘황찬란한 근래의 패키징이 낯설어서, 또는 이미 음원 사이트에서 월정액으로 노래를 듣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누군가는 여기에서 음반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CD로 노래를 듣거나 가사와 Thanks to… 따위가 적힌(요즘은 이런 거 없으려나.) 종이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하기에 이르면, 위화감은 극대화된다. 정말 요즘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까. 하긴, 있으니까 음반에 계속 나오는 거겠지만.

그러나 문득, 스스로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 종이책을 읽겠다고 꾸역꾸역 서점까지 걸어온 사람이 음반을 보고 위화감을 느낀다니. 적반하장, 아전인수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 아날로그 감성의 정체

누군가 나에게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처럼 가성비 좋고 부피도 작은 수단들을 두고서 굳이 종이책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구태의연한 ‘아날로그 감성’을 들먹일 수밖에 없다.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읽는 질감, 오래 두면 누렇게 세월의 때가 쌓여가는 모습, 접힌 귀퉁이나 밑줄 그은 문장들, 서점에서 나는 종이책 냄새, 그렇고 그런 것들. 감성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되지만, 합리적으로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유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게도 카세트테이프와 CD, 워크맨과 CD 플레이어의 추억이 있다. 김광석 다시 듣기라든가, 조성모의 3.5집 리메이크 앨범(얼마나 풋풋했던가, 성모 형님.), 야상곡을 들으며 끝없는 우울의 늪에 빠졌던 김윤아 2집, COOL과 god와 김건모와 브라운아이즈까지.

그런데 그 시절을 자분자분 곱씹다 보면 정작 아련해지는 건 그 음반에서 흘러나왔던 노래가 아니라 음반을 둘러싼 일련의 경험들이었다. 유리에 신보 소식을 붙여둔 레코드 가게에 가서 카세트테이프를 고르던 일, 노래를 들으며 열심히도 읽었던 가사집, 딸깍이는 소리가 경쾌했던 CD 플레이어의 버튼 같은 것들. 사실 우리가 ‘아날로그 감성’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는 감각의 경험들이 아닐까. 그래서 굳이 종이책을 찾고, 굳이 손 글씨며 캘리그래피를 쓰는 것이 아닐까. 가상의 무엇인가를 거치지 않고 내 손끝으로 직접 느끼는 감각의 경험. 바로 그런 이유로 누구에게도 동일하지 않은 각자의 ‘아날로그 감성’이 형성되는 것.

  • 만질 수 있다는 기쁨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작금의 음반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어쩌면 그들은 노래가 아니라 음반 그 자체를 위해서 구입하는 것이리라. 노래는 음원 사이트에서 듣더라도, 음반을 직접 만지고 소유하는 기쁨, 그 ‘아날로그 감성’은 또 다른 차원일 테니까. 무엇인가를 소유했다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소유의 경험이 사람을 충만하게 하니까. 특히 그 대상이 소중한 것일수록.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지 않기로 유명한 가수 나얼. 그가 어쩐 일로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 기획한 ‘좌표 인터뷰’라는 채널로 얼굴을 내비쳤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도입부에는 ‘처음 공개하는 나얼의 작업실’이라는 문장이 자랑스럽게(?) 깔려 있다. 나는 약 20년 전, 앤썸 시절부터 나얼을 좋아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유난히 영상을 집중해서 봤다.

본인의 노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겸손을 넘어선 망언(?)도 인상 깊었지만 영상 시청 내내 눈길을 끌었던 건 미술 작업실임에도 빼곡하게 들어찬 LP와 카세트테이프, CD들이었다. 그 많은 음반들을 사들이고, 듣고, 만지며 쌓였을 그의 감각 경험들은 또 얼마나 무수할까. 영상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음반을 사라.’ 음원 시장으로 바뀌면서 음악이라는 게 형태가 없는 것이 됐잖아요. 어떤 형태가 있고 없고가 엄청난 감성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좋은 감성을 키우고 좋은 감성을 얻으려면, 내가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물건들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앨범들이 그렇잖아요. 갖고 싶은 LP, CD를 소유하기 위해 내가 했던 노력들, 거기서 벌어진 수많은 이야깃거리들, 그런 것들이 다 감성의 밑받침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야깃거리가 없으니까 음악에 대한 열정도 금방 식어버리는 거고, 음악은 다 그런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는 항상 음반을 사야 한다. CD를 사고 LP를 모으고 그런 것을 좀 해라. 그게 너희들이 앞으로 음악 하는 것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요.”

과연, 역시, 옳거니! 나 혼자만의 생각과 추측이 나얼의 입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 듯한 이 기분.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나얼 님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신답니다. 그렇다고 꼭 음반을 사야 한다,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역시 무엇인가를 직접 만질 수 있는 기쁨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만큼은 발품을 조금 팔더라도 만질 수 있기를. 물건이든 사람이든, 질감을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