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할 수 있다는 것

 

어느 카툰에서 본 것 같다.

직장인 밴드 리더가 인터뷰를 하며 “누구든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언제든 참여하세요!”란 말을 했는데, TV를 보며 잠옷을 입고 있던 백수가 “입사를 못하는데, 무슨!”이란 말을 읊조리는 내용이었다.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긁는, 세상 모든 걸 포기한 아니 해탈한 백수의 무표정한 얼굴이 사뭇 진지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웃음은 달지 않았다. 씁쓸했고, 떫었다. 시원하기보단, 가슴이 턱 막히는 탄식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내가 그 카툰을 봤을 땐, 입사 3~4년 차 정도였다.

솔직히, 카툰에 나온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백수 캐릭터가 부러웠다. 나는 고달팠고,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웠고, 괴로웠고, 집에 가고 싶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을까. 취업을 위해서라면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나는, 왜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렇게 초라한 존재가 되었던 걸까. 저기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는 걸까. 아니,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인 것이다. 그 카툰을 봤던 예전의 나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스스로를 점검한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달팠던 건 맘대로 퇴근하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힘겹게 출근한 하루의 시작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출근하는 길부터 내 방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어찌 퇴근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일과 사회 초년생이라는 막내 타이틀은 ‘퇴근’까지의 시간을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처럼 쭈욱 늘려 놓곤 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는데, 돌아보면 정말 어떻게 견뎠을까를 스스로 대견해할 정도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시야, 평생 이렇게 살면 어쩌지란 두려움. 무엇보다 행복하지 않았던 마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고통.

 

그렇게 퇴근을 갈구하던 가련한 존재는, 어느덧 수많은 후배를 맞이한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직장에서 ‘의미’와 ‘배움’을 찾았다. 직장인이라는 삶 자체가 그리 녹록하지 않지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보니 배울 곳이 천지란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지금도 ‘퇴근’을 맘대로 하진 못한다. 업무가 엮이거나, 나보다 더 높은 상사가 퇴근을 하지 않고 무언가에 대해 고민을 하면 나는 그보다 더 깊은 고민을 한다. 그것이 나의 ‘업(業)’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수십 년 직장생활을 하며 돌아보니 나는 그동안 어찌 되었건 ‘퇴근’을 해왔다.

그러니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퇴근’을 한다는 건 큰 사고가 없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늦게 퇴근을 해서, 옷만 갈아입으러 집에 잠시 다녀와도 말이다. 이틀, 삼 일 후에 집에 가더라도. 그리고 또 하루, 나 자신을 대견해하고 사랑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하루를 버텨낸, 그 어려운 ‘퇴근’을 해냈으니.

 

‘퇴근’을 하지 못해, ‘퇴사’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퇴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토닥인다. 또 퇴사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금은 더 나은 퇴근을 할까를 고민한다. 좀 더 나은 퇴근을 하면서 나는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그렇게 될 거라는 나의 다짐과, 그것을 이루어낼 나 자신을.

이번 생은 직장인이라도,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직장생활엔 정답이 없다지만, 정답이 있다면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