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이면 3년을 다닌 태극권 도장이 문을 닫는다. 경영난이었다. 월세가 190만원이었는데, 회원의 수는 점점 줄고 있었다. 단순 계산으로만 봐도 1년에 100만원씩을 내는 연회원이 20명이 있어야 겨우 ‘본전’을 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도장의 총 회원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만 갔지 더 늘어날 기미가 없었다. 새로 들어오는 신규 회원들조차도 초창기에는 월회원으로 시작해서 본인이 재미를 붙이면 연회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수입은 계속 적자였다.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관장님의 연세도 문제였다. 연세가 올해로 82세. 고령에도 정말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강한 태극권의 고수시지만, 공력과 실력과는 별개로 82세라는 나이는 체육관 하나를 적자를 감수해가면서 온전히 운영해가기엔 버거운 연세셨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관장님은 확실히 옛날사람이라는 캐릭터가 분명하셔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나 유행에는 관심도 없으셨다. 내가 태극권을 배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또래가 없는 것이었다. 도관에 그만큼 나이가 많은 올드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었고, 그게 관장님의 도장 운영 스타일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도장의 운영이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관장님께서는 연신 회원들에게 미안하단 말을 하고 계시다. 동시에 각 회원들의 회비를 정산해주는 한편, 이제 도장 소속으로서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승단 심사의 편의를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나는 작년에 대한 우슈 협회의 3단을 취득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4단을 보게 된다. 아직 날짜는 미정이고, 동시에 개인적인 스케줄이 워낙 밀려서 도장에도 자주 나가지 못하지만, 어찌저찌 연습은 계속하고 있다.

헌데 원래도 승단 심사 때는 관장님이 좀 눈여겨서 지도를 해주시긴 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이만하면 됐다, 이것 정도를 수정해라’ 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이번에는 ‘그정도 해서는 망신만 당한다, 그거 하지 말고 차라리 이걸 해라’ 는 식의 말씀까지 해서 순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꽤 있었다. 물론 나는 관장님이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을 지라도, 그 실력이나 지도의 방향과 핵심 자체는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워낙 엄하게 대하시기에 처음에는 ‘도장이 이제 문을 닫으니 제자라는 생각도 안하고 막 대하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은 도장의 회원들을 전부 모아놓고 특별 강습을 하는 날이었다. 원래는 관장님의 배사 제자들, 혹은 승단 심사를 보는 인원들만 모아놓고 강습을 하기로 했었는데, 도장이 문을 닫는 마당에 모든 회원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날의 강습도 꽤나 엄했다. 운동을 5년, 아니 10년을 한 사람들도 관장님의 직설적이고 강한 코멘트에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나한테도 그러했고, 다른 분들이 하는 걸 내가 지켜볼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개중 몇몇 분들은 역시 나처럼 민망한 기분이 들었던 안색이었고, 아마 몇분들은 운동 경력에 비례해서 아직까지도 그런 코멘트를 듣는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회의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강습이 끝날 때 쯔음, 82세의 관장님이 직접 앞으로 나서서 시범을 보이시며 말을 하셨다.

“여러분들 중 몇몇 분은 4단 심사를 보고, 4단을 이미 가지고 계신 분들은 지도자 자격증 심사를 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냥 일반 회원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고,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그렇게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때 나는 관장님의 엄한 지도에 어떤 마음과 의도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나 자신을 반성했다. 확실히 4단 심사를 보면서, 나는 3단 심사를 볼 때와 같은 터무니없는 낙천성을 가지고 있었다. 1 단 심사 때야 긴장을 좀 했지만, 3단 심사 때부터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또 준비 자체도 편하게 하고 심사를 봤었다. 어느순간부터는 평상시의 수련도 너무 편하게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처음에 배우던 그 열심히던 태도와, 여전히 진지하긴 하지만 너무 일상적이고 습관화가 된 지금의 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정말로 4단을 따고 나면, 지도자를 딸 수가 있고, 그러면 스스로 그럴 일을 만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누군가를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너무 여유만만인 마음가짐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등에 식은땀이 날 만큼 창피한 일이었다.

문득 내가 지금 4단 심사를 보러 가서 표연하게 될 동작들을, 나중에 내가 제자를 받고 나서도 그들에게 당당히 이걸 보고 따라하라고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그전과는 같지가 않았다. 현재는 굉장히 진지하게 승단 심사를 준비하고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예상을 하지 못했건만, 나는 자라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대비나, 교육을 몇 차례 받게 되었다. 실제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경험도 물론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은 정말 보통 무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교육자로서 약간의 재능은 있을지언정, 교육이란 일 자체는 굉장히 부담스럽고 어려워한다. 사실 나는 할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잘 하고 싶지가 않다. 한 사람의 인생, 아니 때로는 더 큰 무언가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본 어느 전시회에서는 교육에 대한 인상깊은 이야기가 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한 사람을 가르치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자식, 손자, 증손자 까지도 가르치는 일이다.’

난 그때 칠판에 쓰여져 있던 그 문구를 보고나서 상당히 강한 충격을 받았었다. 나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과연 나를 그렇게 가르쳤었나, 생각해보니 내가 받은 교육으로 인해 나의 자식이나 손자 증손자들은 역시 내가 받았던 교육의 영향을 받겠구나, 나의 엄마와 아빠가 받았던 교육이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구나,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의 자식과 손자 증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겠구나.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확 들어와 똬리를 튼 그 문구는, 이후 내가 내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게까지 했다. 적어도 ‘교육’이라는 거창한 단어 이전에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함부로 행세하려고 하면 안되겠다는 마음과, 하려고 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는 절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공부하던 시절에는 실습 점수가 있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네 작은 도서관에 가서 글쓰기 강의 자리를 하나 따냈던 적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도서관 분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셨고, 내 강의 계획이나 내용에도 너무나 호의적이셨고 감명 깊어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음에도 그분들과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때에도 내가 가졌던 마음가짐은 ‘선생님’으로 불리고 행세하기 보다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나보다 다른 분야에서의 경험도 훌륭하게 많이 쌓으신 분들에게, 그저 생소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교육과 경력을 조금 쌓은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드리고 탐험시켜드린다는 ‘가이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가이드’로서의 역할에는 충실하게 잘 마칠 수 있었고, 이후에도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끔씩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이런 ‘가이드’로의 마음가짐이 처음에는 내가 교육이란 것의 본질에서 도망가려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비판을 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나에게는 그게 옳은 방향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상, 선생님으로 부르고 대접하게 되면 자연스레 상하관계가 생기게 되고, 나이차이에 관계없이 그들은 나를 존대하고 나는 하대하게 되며, 그속에서 자연스레 어떤 계급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가이드’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금씩 이런 일이나 마음은 발생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었고, 실제로 경계했었지만, 일어나고야 말았었고, 항상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떨쳐버렸던 것을, 바로 내가 ‘선생으로 대접받는 것’을 너무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접받는 것은, 정말 중독성이 있었다. 보잘것없는 내가 학생들에게는 정말 아득히 멀리 있는 ‘전문가’(이것은 실제로 그러했고)이자 ‘선생님’이었고, 이렇게 대접받는 것을 즐기고 익숙해지다 보면, 이미 본질과는 멀어지는 것이었다.

또래들을 모아놓고 글쓰기 강의를 했을때는 ‘선생님’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못하게 했음에도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아 편하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이 ‘선생대접’을 어느새 좋아하고 즐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항상 이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은 한때의 학생들과 서로 반말을 하는 관계가 되어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운이 좋게도 내 인생에는 너무 많은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나쁜 선생들조차 내게 큰 악영향을 더 끼치기 전에 내 인생에서 다들 꺼져주었고, 나는 그들처럼 살면 안되겠다는 걸 또 배웠기에,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가 있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또 누군가를 가르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글쎄. 그때도 그저 선생질에 취하기보다는 친숙한 동네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되고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