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움의 가치
  • 공기청정기를 들이셔야 합니다.

최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당장 집값도 집값이지만 원룸, 투룸을 전전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가구와 가전이 필요했다. 막말로 원룸이나 투룸은 풀 옵션인 곳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내 한 몸만 들어가도 당장 살아낼 수 있었는데, 아파트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신혼집이 될 곳이기 때문에 여자 친구와 함께 가구와 가전을 채워나갔다.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구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과정이었다.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기 위한 쇼핑의 최고난도 끝판왕이랄까.

다행히 취향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우리는 딱히 의견차이라든가 언쟁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공기청정기에 대해서만큼은 고민이 됐다. 우선 각자 원룸, 투룸 생활을 이어오던 우리는 공기청정기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었고 아무리 미세먼지가 극성이라고는 하지만 집안에서는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 물론 만만치 않은 가격도 한몫했다. 고민 끝에 좌우지간 들이는 김에 구색을 갖춰 보자는 마음으로 거금을 들여 공기청정기까지 구입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허허벌판이던 아파트가 꽤 사람 사는 집구석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난 지금, 누군가 ‘과연 공기청정기가 필요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댁에 공기청정기를 들이셔야 합니다.”

당장 계기판에 표시되는 미세먼지 농도를 차치해두더라도, 공기청정기를 작동시킨 후의 공기는 체감 가능할 정도로 산뜻했다. 특히 나는 방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긴데, 24평 형 공기청정기를 방에 작동시켜두고 작업을 하면 몇 시간이 지나도 공기가 텁텁해지거나 묵직해지지 않았다. 요새는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아니라 삼한사미(三寒四微)라던데, 가히 공기청정기는 필수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돈 안 들이고 물 마시는 방법 좀 알려줘요.

조금 구태의연한 얘기를 좀 해보자. 불과 20, 30년 전만 해도 “누가 물을 돈 주고 사서 마시느냐.” 라는 말이 만연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가. 돈 안 들이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다면 좀 알려줬음 좋겠다. 혼자 자취할 때는 열흘에 한 번 꼴로 쿠팡에서 2L 들이 생수 6통 묶음을 로켓 배송으로 주문하는 것이 고정 루틴이었다. 이사 후 정수기 냉장고를 구입한 후로는 정수기 사용료를 내고, 싱크대에서 나오는 수돗물을 그대로 음용한다고 해도 수도세를 내야 한다. 그러니까 자연에 흐르는 물을 냅다 떠 마시는, 말 그대로 돈 안 들이고 마실 수 있는 물은 ‘자연인’이 아니고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의 추세라면 공기 또한 비슷한 상황을 면하기 어려울 듯싶다. 물만큼이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지만(적어도 우리가 매일의 공기를 구입해야 하는 지경은 아니니까), 미세먼지 때문에 불티나게 팔리는 각종 마스크라든가, 미세먼지 경보를 위해 전 국민에게 날리는 문자메시지 등등 간접비용 등은 이미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발 빠른 패션업계에서는 ‘스모그 꾸뛰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고급 여성복, 맞춤복을 가리키는 말인 꾸뛰르 앞에 스모그(smog, 오염된 공기가 안개와 함께 한곳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붙여서 ‘대기오염을 인식한 의상’이라는 뜻으로,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등장한 패션 경향이다. 공기청정기가 현대의 백색가전 목록에 추가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 자연 상태 그대로의 물이나 자연 상태 그대로의 공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 내린 후, 어느 동네의 야트막한 뒷산에라도 오르면 꽤 힘찬 물줄기를 만날 수 있다. 약수터에는 플라스틱 바가지도 비치해두지만, 아직 자연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 말고는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확연히 줄었다. 공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존재하는 그 어느 곳이든 공기는 있다.

  • 인공적인 자연스러움

자연 그대로의 것, 자연스러움, 자연 친화적 등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흔히 인공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연과 관련된 것들을 높이 평가한다. 아무래도 인간이 손을 댄 것보다는 자연 그대로가 더욱 좋다는 것이다. 글쎄, 인간이 하는 말 치고는 다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런데 어찌하다보니 자연 그대로의 물, 자연 그대로의 공기를 누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인공적인 자연스러움’의 산물들이다. 시냇물이나 강물 따위를 있는 그대로 마실 수 없으니, 그것을 인공적으로 정수해서 마치 ‘깨끗하고 맑은 자연의 물’처럼 만들어 파는 것이다. 미세먼지니 뭐니 해서 도저히 있는 그대로의 공기로 호흡할 수가 없으니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실내에서는 공기청정기를 작동시킨다. 인공적인 필터를 통해 정화해서 ‘깨끗하고 맑은 자연의 공기’처럼 만들어주는 물건들을 판다.

새삼스럽게 ‘인공적인 자연스러움’의 의미에 대해서 의문스러워진다. 일단 표현부터가 역설적이다. 자연스러움은 일체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니까. 아무리 뛰어난 솜씨라 해도 인공적인 것은 자연의 모방일 뿐이다. 애초에 인공적인 자연스러움을 두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어폐다. 먼 미래에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자연만이 존재하게 되면, 그때에 가서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는 지금과는 딴판으로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 뛰어난 기술이 향해야 할 방향

이사 후 처음 맞는 주말. 때마침 꽃샘추위도 누그러지고 봄볕은 화창했다. 아침을 먹은 뒤 우리는 벚꽃이 피기 시작한 뒷산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가파른 아스팔트 길을 지나 드디어 시작된 등산로 초입, 그야말로 자연이었다.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들이 깔린 흙길, 더할 나위 없는 초록과 청명한 하늘과 멀리서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 부지런히 나무를 타는 청솔모와 간간이 떨어지는 솔방울, 그리고 볕을 따라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과 개나리와 목련.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그 모든 자연들을 담아내려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그 어떤 사진도 원래의 장면을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했다. 자연이란 멈춰진 장면 속의 색채와 농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까. 꽃잎을 비추는 햇살의 밝기와 그 위를 지나는 봄바람의 온도, 수줍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떨림 같은 것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정밀하고도 뛰어난 기술, 그 인공적인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겨우 그럴 듯하게 자연을 모방하는 정도가 최선이다.

정수기에서 물을 걸러 마시고, 공기청정기로 공기를 정화해 호흡하면서도 끝내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이런 인공적인 기술 없이도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날로 발전해가는 뛰어난 기술이 향해야 할 방향은, 망가지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 그 자체를 회복하고 보전하는 일이 아닐까.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