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이라는 게 참 가만 듣다 보면 매력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오독이라는 제목을 지어놓고서 어감이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단무지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상상했다. 화창하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리도록 광대한 봄 하늘, 혹은 가을 하늘 아래서, 햇살이 정말 한가득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창이 시원한 대청 마루에 앉아서, 정원의 풀꽃들을 보며 메인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미리 반찬으로 나온 단무지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고 가만히. 정말 가만히 오독, 오독, 그리고 오도독, 하고 한참을 음미하며 씹어 삼키는 느낌.

사실 내가 쓴 제목의 의미는 그 오독이 아니라 잘못 읽어냈다고 하는 ‘오독’이지만 말이다. 어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오독에서 도 하나만 더 붙었을 뿐인데 오도독, 하는 단무지 씹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오도도도 하고 어린애가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는 귀여운 몸짓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 의미와 다르게 해석된다는 건 그래서 한편 재밌는 일이다. 사실 예술의 역사를 봤을 때도 점점 현대, 그러니까 모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이제 창작자가 일방적으로 어떤 확실한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관객이자 시청자에게 강요하는 시대는 저편으로 저물어간 지가 한참이 됐다.

한국 예술 교육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런 ‘모던’에 대한 몰이해에 있는 것이다. 공교육으로 넘어가면 특히나 심해서 오죽하면 소설가 김영하 씨가 티비 예능에 나와서 ‘소설가들은 자신의 메시지를 작품에 숨겨놓고 독자들과 두뇌싸움을 하는 종자들이 아니다’ 고까지 이야기했겠는가.

이제는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어내면, 각 개인별로 천차만별의 해석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갈 때 그 예술작품이 비로소 완성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작가의 숨겨진 의미찾기’ 같은 논란을 볼 때마다 답답함이 일어난다. 심지어는 특정 작품에 대해서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이런 ‘의미찾기’에서 올 때도 있었는데,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그러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의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일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해석해놓은 글을 쓰고 공유하며 열광했고, 감독도 어느정도는 이런 현상을 즐기는 듯 했다. 정작 내게 ‘곡성’은 그저 개인적인 평이지만 ‘처음에 약속한 장르를 지키지 않고 수수께끼만 잔뜩 남긴 불쾌하고 못만든 스릴러’일 뿐이었다.

내게 감독이 뭔 상징을 어떻게 남겨놓았느냐는 나중에 누군가 글로 써서 공부해야 되는 것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게 영화는 ‘이미지’였고, 나홍진 감독이 제시하는 상징들은 내게 그리 매력적인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르를 뒤튼것도 아니고 홍보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짜고 배반했기 때문에, 나는 이게 그리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저 예상했던 장르가 아닌 다른 장르로 변주됨에 따라서 불쾌한 기분만 들었다. 도대체 내가 스릴러를 보러가서 왜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좀비가 나오고 악령이 나오는 걸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명작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스릴러에서 갑자기 뱀파이어 액션물로 장르가 바뀌긴 하지만, 이 작품은 홍보 단계에서부터 이미 뱀파이어와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를 노출하면서 관객들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극장에서 정확히 기대한 것을 모두 보여주었다. 장르의 변주를 통해서. <곡성>의 경우는 철저하게 미스테리 스릴러처럼 포장해놓고 극장에서 갑자기 좀비와 악령을 보여주니, 나로서는 그저 기분이 더러울 따름이었다.

이 홍보 전략에 대해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홍보 단계에서 작품의 장르와 주요 정보, 그리고 관객이 뭘 기대하고 보러 와야할지를 던져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이 바로 자꾸 이야기하는 ‘장르’와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러브스토리’를 좋아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는 주말 스크린에 걸린 영화들 중 ‘러브스토리’ 장르로 홍보한 작품을 선택해서 보러갈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면? 관객은 그저 충격을 받고 그 작품성에 마냥 환호를 하고 감독이 숨겨놓은 내러티브와 상징을 공부해가며 극찬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지금 4월 3째주에 각색하고 공연을 하기 위해서 정말 피눈물을 흘리며 준비하고 있는 윌리엄 쉐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은, 사실 당대 영국의 런던에서는 단 한번도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 홍보 수단이 굉장히 빈약했기 때문에, 제목을 짓는 것 자체가 이미 장르, 내용, 기대감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만 했었다. 그시절 <햄릿>이 공연될때의 제목은 이러했다.

“덴마크 왕자 햄릿의 처절한 복수 비극.”

이것은 쉐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리어 왕>도, <맥베스>도, 단 한번도 우리가 아는 제목으로 공연된 적이 없었다.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마땅하지만, 적어도 ‘장르’ 라는 게 있는 한 관객들은 기대하는 문법이 있고, 그 문법에 맞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며, 그 문법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해야 마땅함이다.

반면 문화권에 따라서 정말 기상천외한 ‘오독’이 일어나는 경우도 생긴다.

이기호 소설가의 단편 소설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문체부터 성경의 의고체를 빌어와 시작된다. 이야기는 주인공 순덕이 독실한, 너무나도 독실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머지 학교 공교육과 과학적인 상식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성장하여, 기독교적인 맹신 속에서만 세상을 살아가며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을 맹신으로 몰고가거나 종교적 논쟁으로 끌고가 비웃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맹신적 기독교 신자들과, 그들을 비웃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맹신적 모습을 다른 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이들을 비교하며 또한 인간의 존재 이유라는 생각보다 아주 근본적이고 묵직한 철학적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대학 초년생이던 당시 소설 창작 클래스에서 이 작품으로 공부를 하며 너무나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 재밌었다. 심지어는 같은 텍스트로 2명의 다른 교수님들께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들조차도 텍스트에 대한 강의가 달라지는 것, 그리고 그 소설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마치 소설속 맹신자들처럼 텍스트를 숭배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등, 흥미로운 기억이 아주 많은 소설이었다.

당시에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로는, 실제로 어느 교회의 목사가 이 단편 소설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거론하며, 이 소설속에 나오는 순덕이 ‘아주 바람직한 기독교인’ 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글쎄, 뭐 해석은 정말 자유자재이자 백인백색, 아니 심지어 60억 인구가 있으면 60억개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아주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히잡’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 문화권의 기본법을 준수해야하는 것인가, 논쟁이 붙을 경우 고민에 빠진다. 요즘에는 굉장히 이슬람에 대한 감정이 안좋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이 법으로 불법이라면 당연히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주요 여론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살고 있는 친구의 에피소드를 듣고는 상당히 인상 깊었는데, 독일 내 페미니즘 커뮤니티에 참가한 친구는, ‘히잡’은 여성 억압의 상징이라는 백인 여성의 발언에 히잡을 쓴 중동 여성이 “니네 전부가 ‘브래지어’부터 벗고 온다면 나도 여기서 당장 히잡을 벗겠다.” 고 응수했다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나에게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다.

히잡이 여성 억압이라면, 과연 브래지어는 되고 히잡은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런 의문과 조심스러운 중간지대들이 계속해서 생김에도 불구하고, 내게 확고한 ‘레드존’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기인한다. 한국의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중동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가족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극도로 외국인 노동자에 친화적인 공중파 티비 다큐임에도 불구하고, 그 외국인 노동자 가족, 정확히는 외국인 노동자 아버지인 가장의 가족에 대한 억압과 탄압이 도를 지나쳐서 티비 편집으로도 포장이 안되는 수준이었다. 엄마의 경우는 히잡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둘 감싼 수준이었고, 아예 촬영 내내 티비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들어낸 적이 없었다. 이유는 아버지가 타인에게 아내를 보여줄 수 없다고 해서였다. 아이들은 한국어도 곧잘 하고 현지에 적응해서 잘 자라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이제는 모국어보다 한국어가 더 익숙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했고, 한참 자랄 때라 영양 섭취가 필요한 때에 할랄 푸드만을 강요해서 아이들은 돼지고기가 아닌 다른 육류조차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나는 당장에라도 그 아버지의 멱살을 쥐고 뺨을 때린 뒤에 ‘고국’으로 추방해버리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에 남겨놓고 당장 ‘니네 나라’로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다분히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생각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보편적 인권 개념을 타인에 대한 종교 강요보다도 우위에 두는 사람이었다. 또 나는 타인에 대한 종교 강요는 그게 가족일지라도 종교적 자유와는 무관한 그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티비 다큐속 외국인 아버지는 종교적 자유와 신념을 ‘오독’했을지 모르겠다.

최근 티비에 자주 오르내리는 아이돌 승리는 평소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완전히 빠져서 자신을 ‘승츠비’라고 부르며, 운영하던 클럽 버닝썬 에서도 개츠비를 모방한 호화 파티를 열어 연출하곤 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문제의 단톡방에서도 성매매와 마약거래 경찰과 혹은 더 윗선과의 어두운 거래를 얘기하면서 ‘오늘밤 우리 위대한 개츠비 만드는 거야’ 라고 하는 등, <위대한 개츠비>를 자꾸 인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절대 호화로운 파티가 전부인 작품이 아니다. 그 속에 인간의 고독, 허무, 그리고 절대 버닝썬에서 벌어지던 그 추악한 모습들과는 섞일 수 없는 순수한 한 사람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배반을 담고 있다. 끝내 추락하고 마는 개츠비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화려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타락한 주변인들을 대비하며 <위대한 개츠비>는 끝을 맺는다. 현실의 승리는 이야기 속 개츠비처럼 순수함을 간직한채 추락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척 추악한 속내를 감추며 일상으로 복귀하지도 못했다. 오독의 대가라기엔 너무 큰 것일까? 승리가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읽어내기만 했다면, 아니 영화를 보고나서 원작인 책이라도 읽어봤다면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저 가십거리밖에 안되는 궁금증일 뿐이다. 그가 죄를 저질렀으니, 죄값을 정당하게 치르면서 고통받기를 기원한다. 죄 없는 개츠비는 그만 좀 들먹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