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이지만 참 제목 짓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그래서 요즘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감탄하는 게 ‘제목 학원’ 시리즈이다. 세상에 제목 잘 짓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마이클 잭슨의 표정과 손짓을 보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라는 제목을 붙여놓은 걸 봤을 때는 웃음과 감탄을 넘어 경외의 감정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살면서 하도 바쁘다보면 일기 쓰기가 뜸해지는데, 사실 하도 할 일이 없어지면 일기 쓰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과거에 정말 일기를 매일매일 쓸 수 있었을 만큼 시간이 남아돌았던 시절을 꼽자면 아무래도 중고등학생 학창시절과 대학교 1학년과 2학년 시절을 들 수 있겠다. (초등학생때는 일기를 자의로 쓴 게 아니라 강제로 쓴 거니 제외한다. 아, 그러고보니 초등학생때는 일기에 강제적으로 제목을 붙였구나… 진짜 어린나이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어쨌거나 특히나 일기를 가장 열정적으로 또 의무적으로 쓰려고 했던 건 대학교 1, 2학년 때였다. 이때는 어찌나 열정적이었는지 정말 거의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거의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일기장도 반년이 안돼서 갈아치울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정말 하루종일 한거라고는 밥먹고 숨쉰거밖에 없는 날조차도 붙잡고 일기를 썼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밤이 됐고 할 일이 없으니까 일기장앞에 앉아서 붙들고 쓰기는 쓰는데… 이건 뭐 도통 쓸 말이 있어야지. 하루종일 한게 없는데 일기장에 뭘 쓰겠나. 결국엔 관념적인 이야기나 이런것만 쓰게 됐는데, 이것도 하루이틀이지 쓰다보면 참 나도 단순한 인간이라 엊그제 했던 생각 어제도 하고 오늘도 또 하고 있는데 그걸 또 반복해서 일기에 쓰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것도 못할짓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일기에 소재가 떨어지면 내가 단골로 하던 작업이 있었다. 이걸 뭐라고 이름붙여야 될지가 참 난감한데… 간단히 얘기하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 정리’ 였다. 태어나서 정확히 지금 일기를 쓰는 현재까지의 내 인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는 것이었다. 이게 중고등학교때에 최초로 시작해서 정말 많이 했던 작업이었는데 그때는 아마 사춘기이고 인생의 고민을 하던 시기라 그랬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때 일기를 찾아보면 이 ‘내 인생 정리’ 한 글이 1년에 10개이상씩 될 때도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같은 걸 정리한 글을 1년에 10편 이상씩 써댔으니, 어찌보면 살면서 자소서 쓸 일이 있으면 그거 하나는 기깔나게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런 작업들을 대학생때도 했었는데, 중고등학생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때는 글에 제목을 한번 붙여봤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글보다는 글로 쓴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제목을 붙여봤던 거지만. 내 인생을 한 장의 글로 의식의 흐름대로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기묘한 작업이었는데, 그걸 한 문장 혹은 한 단어의 제목으로 정리하는 건 더 기묘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정리되고 이름붙여진 내 인생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이건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말이다. (애당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제목이 뭐 그리 대수로운 건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이 붙여준 제목을 하나 가지고 살아간다. 바로 이름이다. 이름이 제목이 아니면 뭐겠는가. 사실 이름이란게 뭔가를 구분짓기 위한 것 말고는 크게 쓸모도 없어 보이지만, 평생 이고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을 들여서 짓지 않는가 말이다. 의미도 의미지만, 무엇보다 음성 언어를 가지고 평생을 소통하는 인류의 특성상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인 자기 이름의 질감과 형태가 그 사람의 인성과 인생의 방향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의미가 너무 거창해서이다. 동녘동자에 빛날욱자를 쓰는데 흔하기도 흔한 이름이거니와 무려 ‘태양’ 이라는 서브 텍스트가 나라는 사람에게는 너무 과분한 의미가 아닌가 항상 의심을 하게 된다. 자연물을 워낙 좋아해서 차라리 바다나 산, 나무, 동물이나 순환, 하다못해 태양보다도 달에 관련된 이름이라면 음미하며 두고두고 불러보고 써보기도 하며 좋아했겠지만, 동쪽의 빛, 태양이라는 이 이름이 나는 참 부담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발음 때문이다. 나는 한국어의 장점이자 약점이 바로 명확하게 들어가는 받침구조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어의 경우는 한국어와 어법이 비슷하지만 질감은 굉장히 다른 것이 바로 받침이 거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김에도 동에도 욱에도 세글자 전부가 받침이 들어가는데 이것부터가 사실 발음이 ‘이쁘게’ 들리는데는 상당히 방해가 된다. 동과 욱에는 그나마 이응이 들어가서 썼을 때 동글동글한 귀여운 느낌이 아주 약간 들지만, 발음해보면 동에서 욱으로 이어지는 발음이 같은 이응이라 연음처리가 되는 바람에 명확하게 발음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진다. 외국인들에게, 혹은 처음만나는 사람에게 흘러가는 듯한 발음으로 얘기하면 ‘동훈’ 혹은 ‘동운’ 혹은 ‘돈욱’ 아니면 ‘도눅’처럼 이응을 다른 명확한 발음으로 대체하여 인식하는 일이 잦다.

이름을 명확하게 발음하여 인식시키려면 동! 욱! 하고 발음해야 하는데 이렇게 끊어서 발음하면 너무나도 못나게 들린다. ‘스미레’ 혹은 ‘나카자와’ 혹은 ‘마코토’ 같은 일본어 이름이 부러울 때가 이럴때인데, 받침이 없다는 단순한 차이는 이름을 끊어 읽을 필요도 없게 해주고, 그 자체로 키읔같은 탁음이 들어가더라도 발음했을때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혹은 자연스레 흘러가는 느낌을 주게 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여행을 갔을 때는 결국 내이름을 이야기하기가 오죽 싫어서 그저 ‘킴’ 이라고만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딱히 개명을 하고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이름을 이고지며 사는 것, 도 어떻게 보면 내 캐릭터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러고보면 그게 내 성격의 정확한 한 단면인 듯 하다. 눈앞에 닥친 맘에 들지 않는 일은 회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스트레스 받아가며 이고지고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 요새는 이게 좀 무식한 일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개명을 하거나 다른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회피’거나 ‘도망가는 것’은 아닐수도 있는데 말이다.

연극을 3달에서 4달 가까이 준비하고 진행해나가며 이제 다다음주면 공연을 앞두고 있다. 오랜만에 한 연극이기도 해서 감회가 남다르기도 했지만, 이번 연극을 하면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작업 자체에 회의가 좀 들기도 했다. 내가 이전과는 달리 순수하게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이 너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연극을 하면서, 그리고 극작을 하면서 나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극작가’로 지어놓고 살았다. 지금까지도. 어찌보면 그게 내가 나에게 지어준 ‘제목’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도 극작가로 쭉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면, 내 메인 타이틀은 그래도 계속 극작가여도 좋은 것일까?

나는 나를 글쓰는 극작가, 그리고 태극권을 하는 태극권사, 그리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고 추는 땅게로, 로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의 타이틀을 정하자면, 나는 이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중에 메인은 당연하게도 극작가라고. 최근에 이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죽고나서는 극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연극을 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를 더 최대치로 살아내기 위함이지만, 극작을 해서 글로 무언가를 남기는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불멸’을 꿈꾸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내 연극이 계속해서 공연된다면 나는 그 속에서 살아있을테니 말이다. 물론 그러려면 내가 죽어도 내 연극이 계속해서 공연될만한 작품을 쓰는 대작가가 되는게 먼저겠지만.

살면서, 그리고 죽는 순간에는 춤도 괜찮게 추고 매너도 좋고 유머러스했던 땅게로로 기억되고 싶다. 사실 나는 내 장례식이 밀롱가였으면 하고 생각한지가 꽤 되었다. 장례식을 온 사람들은 3일동안 일정 시간동안에는 밀롱가에 참여하여 같이 춤을 추고, 와인을 마시며, 그리고 나와 췄던 춤을 추억했으면 한다. 실제로 내가 가장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요즘은 탱고를 추는 순간들이다. 글쓰기? 태극권? 완벽에 가까운 한 딴따의 탱고를 추는 순간에는 그 무엇도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땅게로로 살고, 죽고 싶다. 물론 프로 댄서 수준까지 추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내 이름으로 된 댄스홀 하나 정도는 가져봤던 채로 죽고싶은 바람이다.

태극권. 중국무술. 사실 이건 그저 너무나 삶의 일부가 되었기에 좋고 싫고의 차원조차도 넘어선 타이틀이다. 내가 극작을 안하고, 탱고를 안하는 날은 있을지언정, 태극권 수련을 단 1초라도 안하는 날은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손목을 돌리고 머리를 돌리는 스트레칭만 하는 날이 있더라도 말이다. 나는 매순간 태극권사로 살아갈 것이다. 목표야 우리 관장님만큼의 공력을 가지는 거지만, 그건 사실 도달하지 못하는 목표일 수도 있다. 그래도 태극권사로 살아가는 인생은 재미를 넘어서서 삶의 일부가 된지가 오래이다. 이걸 하면서 건강해지고, 스스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태극권에 뭔가 기여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사실 내가 하고있는 태극권부터 잘하고 볼 일이다.

닉네임을 쓸 일이 별로 없다가, 아르헨티나 탱고를 시작하면서는 장난스레 지었다가 본명보다 더 좋아하게 되고 잘 쓰는 닉네임이 생겼다. ‘김토끼’ 라는 이름이다. 너무 거창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면서 자연물에 대한 이름이고, 뭣보다 받침이 적어서 발음하기 편하고, 불렀을 때 친근하고 귀엽다. 뭐 가끔 닉네임 바꾸라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는 한데. 내가 만족하는 내 이름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아니겠는가. 어찌보면 탱고의 닉네임을 가장 좋아한다는 게, 내가 어떤 제목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나타내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10년뒤에는, 내 인생이, 그리고 나라는 사람에게, 또 어떤 제목이 붙어있을지가 궁금하다. 나는 나에게 어떤 제목을 붙여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