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노보다 노동요

공부하라고 지어둔 무료 대학 도서관을 놔두고서 굳이 4000원, 5000원씩 써가며 카페로 몰려드는 ‘카공족’. 넓고 쾌적한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과,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와 일명 ‘예서 책상’으로 불렸던 1인 독서실 책상을 방에 들이는 사람. 그밖에도 저마다의 다양한 작업, 노동 환경에서 보듯 사람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기 위한 조건은 제각각이다.

그중에서도 소리 환경은 사람마다 꽤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거의 적막에 가까워야 한다는 사람, 약간의 백색소음이 필요한 사람, 좋아하는 노래, 즉 일종의 노동요가 필요한 사람 등등. 전자와 중자의 경우 별로 까다로운 세부 항목이 없지만, 후자의 경우 노래의 장르나 볼륨, 가사의 유무에 따라 천차만별의 세부 항목이 적용된다. 애초에 노동요란 일반적인 감상 목적의 노래와는 달리 ‘작업의 지루함을 달래고 효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발라드라도, 그 노래를 듣다가 헤어진 옛 애인이 떠올라 도저히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눈물지어야 한다면, 그건 노동요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몇몇의 노동요를 소개하려 한다. 흔하고 대중적인 노래가 아닌, 조금 생소하고 남다른 노동요를. 꽤 오래 되어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지만 여전히 듣기 좋은 명곡, 음원 사이트 인기 차트에는 없지만 한구석에서 눈치 빠른 리스너들의 사랑을 받았던 곡들, 주변 지인에게 알려주면 좀 있어보일 법한(?!) 그런 노동요를. 뭐, 이중에 하나라도 얻어 걸려서 여러분의 작업 효율이 높아진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메리카노보다 효과 좋은 노동요를 소개한다.

  1. The Animals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1964

첫 번째 노동요는 The Animals가 1964년에 발표한 The House Of The Rising Sun (해 뜨는 집)이다. 원래 미국의 민속 음악으로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와 영국의 가수들이 여러 차례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했다. 그중에서도 영국 밴드 The Animals의 록 버전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했으며, 영미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롤링 스톤 지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 중 2010년 123위를 기록했고, 국내에서는 가수 김상국이 ‘해 돋는 집’, ‘해 뜨는 집’ 등으로 번안하기도 했다고.

아무튼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 노래를,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1964년 The Animals의 버전을 1989년 출생인 내가 듣게 된 건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취미 있는 인생』을 읽고서였다. 매일의 소소한 즐거움부터 시작해 낚시, 영화, 음악, 오토바이와 차에 대한 작가의 취미를 주제로 이어지는 이 책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이 곡을 ‘청춘의 테마송’이라고 말한다. 그 영향이었을까. 등단 직후 작업을 위해 고요한 정적을 찾아 헤매던 그는 ‘어차피 완전한 정적이란 있을 수 없고, 혹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고독한 나머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시끄러운 록 음악을 그만이 노동요로 채택해버렸다.

특히 등단 이전 무역회사에서 텔렉스 기사로 근무하던 시절, 어느 다방에서 듣게 된 The AnimalsThe House Of The Rising Sun은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되었다. ‘이렇게 회사원 따위로 인생을 보잘것없이 보낼 수 없다’며 전전긍긍하던 차에 우연히 들려온 이 곡은, 그의 표현 그대로 하면 행진곡이자 청춘의 외침이며 자신의 국가(國歌)였다.

평소 발라드와 힙합, 인디 음악 위주로 듣던 나도 마루야마 겐지의 거창한 이야기를 읽고 호기심이 생겨 The Animals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노래를 찾아들었는데, 전혀 뜻밖에도 쏙 마음에 들어버렸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기타 도입부와 분노와 회한을 툭툭 내던지는 듯한 거친 보컬, 중독적인 멜로디까지. 특히 작업할 때 노동요로 틀어두면 댄스 음악이나 힙합과는 또 다른 방식의 고조감을 더해줘서,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텐션이 떨어질 때 톡톡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후 가사를 찾아, 표면적으로 뉴올리언스에 있던 해 뜨는 집이 비참한 가정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시, 팝송은 때로 가사를 모른 채로 들어서 더 좋을 때도 있는 법. 아무튼 작업 중에 경박하거나 가볍지 않게, 너무 밝지도 않게 긴장감과 고조감을 더하고 싶다면 The Animals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노동요로 들어보길 추천한다. 혹시 마음에 들었다면, <봄비>를 부른 가수 박인수 님의 버전도 찾아들어보시길. 차원이 다른 샤우팅과 가창력으로 침침해진 시야를 확 틔워줄 것이다.

  1. Western Kite(웨스턴 카잇) – Subtitle (정규 앨범)/ 2017

웨스턴 카잇은 2017년 8월 첫 정규 앨범인 Subtitle을 발표하며 인디 음악계의 실력파 신성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앨범 소식이 없어서, 나의 기대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부풀어가고만 있다는 걸 웨스턴 카잇은 알고나 계실까. 노래만 들어서는 밴드일 것 같았는데, 찾아보니 솔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놀라운 사실!

음악적으로 조예가 깊지 않아서, 이걸 어떤 장르라고 칭해야 할지, 그냥 ‘인디 뮤지션’이라고 퉁 쳐도 되는 건지, 어떤 곡에선 재즈 느낌도 나고 또 어떤 곡에선 아프리카 음악 같은 드럼 소리도 나고… 아무튼 앨범의 곡들이 전체적으로 톤은 일정한데, 각 곡마다의 느낌은 제각각이라 앨범 전체를 재생해두어도 지루하지 않게 금세 시간이 흐른다. 목소리는 가수 선우정아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라이트한 느낌이다.

당장 나조차도 미리 알고 웨스턴 카잇을 검색해 노래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노래와 분위기가 좋아 자주 가던 카페에서 웨스턴 카잇사랑의 죄인을 듣고서 푹 빠져버려서 얼떨결에 그녀의 앨범 전체를 정청(靜聽)하게 되었다. 노동요로서는 ‘적당한 파고의 물결’ 같아서, 지루함과 경쾌함 사이의 안정적인 텐션을 유지하게 해주는 앨범이다. 담백하고 구체적이면서도 세련된 가사도 한몫해서, 자칫 올드하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비교적 경쾌한 멜로디의 곡으로는 좀비, 사랑의 죄인, 밥 때 등이 있고 느리거나 울적한 멜로디의 곡으로는 B1, 그러나 봄이 있다. 그 외에 짝사랑, 왜, 일방통행 등의 곡은 작업 텐션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적당한 느낌이다. 특히 스피커라는 곡은 1분 14초라는 짧은 길이, 아프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특유의 북소리와 단순한 가사, 자칫 따분할 수 있는 곡에 활기를 더하는 가성부 등이 잘 어우러져서 작업 시에 한 곡 반복 재생을 해두고 노동요로 듣기에 좋았다.

  1. Stevie Wonder – The Definitive Collection (베스트 앨범) / 2002

‘남다른 노동요 리스트’라더니 웬 스티비 원더? 그 마음 다 이해하니 제 말씀 좀 들어주시길. Isn’t She Lovely, Lately,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그 외에도 정말 주옥같은 명곡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비 원더의 2002년 발매 베스트 앨범인 The Definitive Collection을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발적으로 스티비 원더의 곡들을 찾아 듣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곡, 또는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곡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모르는 곡이 더 많기 때문이다. 주변의 20, 30대를 통해 물어보니 심지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곡을 모아뒀다는 베스트 앨범인데도, 절반 정도는 익숙하지 않다는 응답을 받았다. 만약 ‘그건 네 주변 지인들이 음악 문외한이라 그렇고, 누가 이런 명곡을 모른단 말이야.’라고 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죄송하지만 어느 분야든 전문가나 준전문가, 덕후보다는 문외한이 많은 법이라고 대답드릴 수밖에. 그러니 좋은 건 다 같이 나눠 듣자고 너그럽게 생각해주시길.

특히 앨범 수록곡 중에서 노동요로서 흥을 돋우고, 산뜻한 기분을 더해줄 수 있는 경쾌하고 즐거운 노래만을 소개한다. 근데, 곡수가 꽤 많다. 그만큼 신나는 노동요가 많다는 뜻이다.

– I Wish
– Master Blaster(Jammin’)
– I Was Made To Love Her
– Heaven Help Us All
– Higher Ground
– Do I Do
– Uptight

사실 이것 말고도 더 많은데… 아쉬움을 더하기 위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아마 스티비 원더 옹은 리스트 소개에 또 등장할 것 같아서, 그때 더 많은 곡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위 7곡만 전체 반복으로 재생해두어도 작업 내내 텐션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글을 적으면서 내내 베스트 앨범을 듣고 있는데, 언제나 존경을 표하게 되는 우리의 스티비 원더 옹…

– ‘남다른 노동요 리스트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