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 노동자를 위한 감성 충만 노동요

노동요는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장르와 볼륨, 시간 및 반복 구간 등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작업 종류에 따라서도 활용 양상이 다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순 반복 노동을 할 때에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볼륨을 한껏 높인 댄스, 트로트, 힙합 장르의 노동요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고 정적이면서 세밀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할 때에는 잔잔한 볼륨의 발라드, 가사가 없는 연주곡 등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프리랜서 작가인 나의 경우, 작업의 8할은 글을 쓰는 것이다. 나머지 2할은 각종 집안일이나 운동 정도. 굳이 내 입으로 거창한 표현을 하고 싶진 않지만,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는 일 또는 그림을 그리는 일 등의 활동은 모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에 해당한다. 그걸 두고 세간에서는 예술적 활동이라고까지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우선 나는 그리 예술적인 글을 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단순 반복 노동은 아니고, 그렇다고 정적이면서 세밀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과도 구별된다는 점에서 슬쩍, 예술 노동자의 범주에 발을 들이밀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또 ‘예술’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감성’ 아닐까. 해서, 이번 편에서는 ‘예술 노동자를 위한 감성 충만 노동요’를 소개해드린다.

 

1. 이예린 – 우리를 위해 (싱글 앨범) / 2017

            – 가까워져요 (싱글 앨범)/ 2018

            – 바다가 되고 싶어요 (싱글 앨범) / 2018

 

이예린은 2013년 제24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에서 그대의 우주라는 곡으로 장려상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 싱어송라이터다. 길동소녀의 앨범 수록곡 작은 새의 피쳐링과 MINTPAPER PRESENTS bright #6. 컴필레이션 앨범에 난 원래 이랬어요를 발표한 뒤 2017년부터는 싱글 앨범 위주로 2018년 8월까지 꾸준히 곡을 발표해왔다. 발라드로 분류되긴 하지만 정통 발라드의 문법을 따르기보다는 약간은 인디 음악의 느낌을 세련되게 풀어낸 발라드처럼 들린다. 맑은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까슬까슬한 숨소리와 무심한 듯한 끝음 처리가 묘한 감성을 담아낸다.

 

내가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건, 지난겨울 자주 가던 카페에서였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 근처에는 ‘계절의 온도’라는 개인 카페가 있다. 큰 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에 소소하고 모던한 소품들, 그리고 늘 한쪽 벽면에는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상영해두는 곳. 색색의 문학동네 시집들이 있고 꼭 몇 곡씩은 챙겨가고 싶은 노래를 틀어두는 곳.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 원룸에서 지낼 땐, 갑갑하다는 핑계로 늘 카페를 전전하며 작업을 해댔는데 그중에서도 계절의 온도는 가장 편안한 기분으로 좋은 글을 써냈던 곳이다. 분명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계절의 온도에서 내가 처음 들었던 이예린의 곡은 바다가 되고 싶어요였다. 전주를 들었을 땐 얼핏 문문 노래인가 싶었는데, 여자 목소리가 나와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웬걸, 목소리도 정말 매력적이고 힘을 뺀 채 솔직담백하게 읊어가는 가사도 좋았다. “뜨겁네요, 날이 갈수록 무덥네요. 난 겨울을 좋아하죠. 땀나는 건 딱 질색이에요.”라고 시작해서 “그런데요, 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름다워서 움직이질 못하겠네.” 라며 괜히 딴말을 하는 것 같더니 기어코 “사실은요, 주황빛 노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신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라고 고백해버리고 마는 전개 같은 것. 겨울이라는 계절을 다 잊고서, 곡에 푹 빠져 노을 진 바닷가에 앉아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예린은 곡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야말로 양보다 질을 실천해내는 가수였다. 무엇 하나 아쉬운 곡이 없었고, 특히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도 함부로 우울해지지 않으려 하는 목소리는 어떤 어른스러움마저 느껴졌다. 작업을 하면서도 감정에 북받쳐 버겁지 않았고, 그리운 순간들을 떠오르게 해 주어서 평소의 건조한 감성으로는 써내지 못할 문장들을 꽤 많이 쓸 수 있었다. 감성 충전 노동요로서의 효과를 몸소 체험해본 바, 적극 추천하고 싶다.

 

글이 아니라 그림을 창작해내는 이에게는 이예린의 노래가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여러 노래 중에서도 특히 우리를 위해라는 곡이 그림이 된다면, 얼마나 아련하고도 아름다울지도.

 

2. 안녕의 온도 –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밤 (feat. 황득경 Of 노티스노트) / 2016
– 잔인해 / 2017

                  – 말해버리면 / 2018

                 

안녕의 온도는 키보드에 윤석철, 드럼에 소월, 베이스에 정상이, 기타에 이수진으로 구성된 밴드다. 잉? 그럼 노래는 누가 해? 밴드 내부적으로는 주로 키보드의 윤석철, 드럼의 소월이 노래를 하고 선우정아, Grace, 박준하, 모하 등등 피쳐링을 통해 다양한 보컬을 보여준다. 안녕이라는 단어가 지닌 다양한 온도를 노래한다고 해서 안녕의 온도라는 이름을 쓴다고. 2015년 첫 싱글 앨범 사랑의 한가운데를 시작으로 8편의 싱글 앨범과 1편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불과 며칠 전, 혼자여도 난 좋아라는 싱글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외부 피쳐링이 아닌 경우, 그러니까 키보드 윤석철이 보컬을 맡은 잔인해 같은 곡을 들어보면 사실 가창력 자체가 뛰어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와 찰떡 같이 멜로디에 달라붙는 톤이 가창력을 굳이 따지지 않고도 노래를 듣게 만든다. 같은 이유로 말해버리면 또한 좋다. 그 흔한 바이브레이션도 없고, 3단 고음도 없고, 노래 좀 한다는 가수들이 습관처럼 하는 반음 꺾는 추임새도 없는데 가만가만 듣게 된다. 말하듯 노래를 부른다는 게 바로 이런 거 아닐까. 그래서 듣는 내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고, 작업에 방해되는 요소도 없다.

 

특이하게도 내부 보컬보다는 외부 피쳐링으로 채워진 곡이 더 많은데, 다들 어쩜 그렇게 안녕의 온도 노래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들뿐인지. 선우정아는 사랑의 한가운데처럼 가창력 과 감정이 폭발하는 곡을 부르고, 담백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목소리의 Grace 지언 짝사랑과 어쩌면 좋을까를 부르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노티스노트의 황득경이 피쳐링한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밤이다.

 

이 곡은 가사도 멜로디도 쓸쓸한데, 황득경의 담담한 목소리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너무 절망적이지 않게 받쳐준다. 내가 듣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천성적인 긍정과 활기가 담겨 있는 것 같은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이 쓸쓸한 곡과 잘 어울린다. 또 나는 안녕의 온도 곡 중 이 곡의 가사를 가장 좋아한다. “공기도 내 맘을 주체 못 하는 밤, 텁텁한 내 말이 벽에 닿지 못해”라는 표현과 “삶은 가볍고 순간적인데, 하루는 길고 너무 무겁다”와 같은 문장.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곡은 삶의 의욕을 소진시키거나 하려던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가 떠오르다가도, 그 좁다란 방의 바람벽을 찬찬히 짚으며 삶의 슬픔을 인정하고 배워가는 어른스러움도 배어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하는 긍정은 조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듣다 보면 어떤 희망이 느껴진다. 곡의 제목처럼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밤’은 짙고 춥고 외롭겠지만 겨울 다음의 봄을, 밤이 지난 뒤의 아침을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칼럼이나 정보성 글을 쓸 때보다는, 주로 에세이나 시를 쓸 때 자주 들었던 노래다. 진정한 긍정, 진정한 위로라는 건 눈앞의 슬픔과 좌절을 모른 체하고 마냥 괜찮을 거라고 낙관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직면하고서 인정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그 처절함에도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가리라는 것이 바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힘이니까. 안녕의 온도가 부르는 겨울로 가기 위해 사는 밤에는 그런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