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노동요 리스트 3편
  • 묵직한 저음, 동굴 목소리 노동요

어릴 적, 엄마에게 혼난 뒤 울적한 기분으로 방에 앉아 있으면 아부지가 슬쩍 들어와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이 맨날 웃고 맨날 행복할 수는 없지.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혼나기도 하고 그런 거다. 맨날 웃고 맨날 행복하면 그거는 바보지.” 딴에는 위로라고 해주신 말씀인데, 사실 전혀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맨날 웃고 맨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으니까. 가끔 바보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서른을 넘기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조금씩 골고루 맛보기 시작하니 어릴 적 아부지의 말씀도 이해는 된다. 겪고 싶지 않은 슬픔과 고통, 분노들을 우리는 온전히 피할 수 없을뿐더러, 지나고 나면 오히려 그런 괴로움이 인생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상처입지 않고서는 상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는, 글쟁이의 숙명도 더해졌다.

그런 점에서 이른 바 ‘작업 환경’에도 다채로운 감성이 필요하다. 매번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만 들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작업의 결과물 또한 판에 박힌 듯 천편일률적일 수 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차분하고 느린, 슬프고도 우울한 감성을 섞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게다가 가슴보다 더 아래의, 거의 단전을 울리는 듯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라면 그 효과는 더욱 극적일 것이다.

남다른 노동요 리스트 3편에서는 묵직한 저음, 동굴 목소리를 가진 가수의 노동요를 소개한다.

  1. 사뮈 – 새벽 지나면 아침 EP (미니) / 2016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 EP (미니) / 2018

사뮈는 4인조 밴드로 2016년 EP 앨범인 새벽 지나면 아침으로 데뷔했다. 보컬인 사뮈는 정작 노래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전혀 없으며(!?), 원래는 ‘다브다’ 라는 팀에서 베이스를 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곡을 직접 작곡, 편곡하는 싱어송라이터다. ‘삼위일체’도 떠오르고, ‘알베르 카뮈’도 떠오르는 사뮈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기독교 신자인 그가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얼마 안 되어 지은 이름이라고.

우선 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무겁고 우중충한 사운드보다도 유별난 저음에 놀라게 된다. 게다가 끝음도 공기를 많이 섞어 여리게 흘리는 것이 아니라, 발음을 꾹꾹 눌러 부르기 때문에 얼핏 결연한 느낌마저 든다. 개인적으로는 가사와 멜로디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작업 환경에 대단히 쓸쓸하고 우울한 감성을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사뮈답게, 그의 가사들도 일반적인 가요와는 결이 다르다. 단순히 연인과의 이별, 그에 따른 그리움이나 후회를 얘기하는 대신 자기 내면의 불완전함과 모순에 집중하는 가사가 많다. 찌그러진 동그라미에서는 ‘우리는 찌그러진 동그라미야. 얼룩진 나의 열망은 모두 요단강에 던져버렸고, 이제 주머니에 잡히는 건 빈 곽과 라이터뿐이군요.’라며 한때 완전한 동그라미의 열망으로 눈동자마저 빛나던 시절을 염세적으로 노래한다.

마음은 언제나 여러 개가 있지에서는 ‘나만 알고 싶어요. 바보 같던 그 옛날. 내가 역겨운 듯 바라보던 네 눈. 정말로 그 기억만 남아버린대도 까먹은 척 너에게 상냥할 거야.’라며 상대의 경멸을 모른 척하며 과거를 극복한 듯 하다가도 ‘이 마음 절대 보여줄 수 없어. 이 마음 절대 보여줄 수 없지. 혹시나 이 마음 알아차린다면, 정말로 모른 체 해주시겠나요.’라며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부정적인 마음을 모른 척해주길 바라는 솔직한 심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그의 노래 중에서도 이별과 그리움을 다룬 가사가 있는데, 그마저도 직설적인 일반 가요의 문법과는 달리 시적인 은유를 많이 활용한다. 거리에서 ‘쌓인 그리움은 오늘도 나를 또 한 번 걸고 넘어지지.’ 라며 거리를 거니며 지난 연인을 떠올리는 쓸쓸함을 표현한다. 우리의 시간이 같은 시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에서는 ‘시간을 지나가고 있어요. 어쩌면 시간이 날 지나가는 걸 수도 있구요. 시간이 지나가는 걸 수도 있어요.’ 라며 얼핏 말장난 같지만 후회와 그리움의 시간을 견디는 스스로를 끈질기게 관찰하지 않고서는 써낼 수 없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이렇듯 사뮈의 노래들은 묵직한 저음의 동굴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사에 깃든 염세적인 분위기 그리고 다소 어려운 내용까지 별 생각 없이 흘려듣기엔 좀 버거운 감이 있다. 그러나 산만하지 않으면서도 단전에서부터 정신이 번쩍 드는 목소리의 매력은 작업 중에 색다른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더해서 그의 가사를 곰곰이 곱씹다보면 뻔하게 여겼던 사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한 번쯤 의구심을 품으며 새삼스러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를 수도 있다.

  1. 곽진언 – 나랑 갈래 / 2016
    함께 걷는 길 / 2018
    자유롭게 / 2018

곽진언은 2014년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6>에 출연해 우승까지 거머쥔 가수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우승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가창력이나 스타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고음’을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도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K-POP 스타>에서 심사 위원이었던 박진영양현석이 매력적인 저음을 가진 실력자들에게 수시로 ‘고음’ 가능 여부를 확인했던 것을 상기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이후 대중적인 활발한 활동은 없지만 꾸준히 앨범을 내며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곽진언을 아는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그는 고음 하나 없이도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데뷔도 하기 전, <슈퍼스타 K6>에 처음 등장해 불렀던 자작곡 후회를 찾아 들어보시라. 본인의 엄마가 살아오며 잃어버렸을 것들에 대한 노래라는 후회의 가사는 이렇다.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지. 죽도록 기도해봐도, 들어지지 않는 게 있지. 그중에 하나, 떠난 내 님 다시 돌아오는 것. 아쉬움뿐인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마도 후회라는 건 아름다운 미련이어라.’ 주로 우울하고 쓸쓸할 때 곡을 쓴다는 그의 얘기처럼, 멜로디도 가사도 눈물 날 만큼 슬프지만 어쩐지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여운이 있다. 나는 그의 데뷔 이후 곡들을 들으며 그 여운의 정체를 나름대로 규정할 수 있었는데, 그건 다정함이었다.

사뮈의 목소리가 결연하고 염세적이면서 일면 스스로 괴로워하는 마음마저 담고 있는 저음이라면, 곽진언의 목소리는 다소 연약하고 아련하지만 대상에 대한 다정함과 애정을 담고 있는 저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다정함은 아주 자연스럽게 위로와 위안으로 이어진다. 괜찮다고 힘내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더욱 큰 위로가 되듯이, 곽진언은 긍정을 강요하는 대신 쓸쓸함을 다정하게 보듬는 노래를 한다.

한때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 재생하며 위로 받았던 그의 노래가 바로 나랑 갈래였다. 아무 연주도 없이 곽진언의 목소리로만 시작하는 첫 소절에서, 아 이게 바로 목소리의 힘이구나. 곽진언이 가진 목소리의 다정함이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햇살 따듯한 날에 나랑 여행 갈래. 다신 안 돌아오게 아주 먼 곳으로’ 이 얼마나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인 제안인가. 직장 때문에, 돈 때문에 당장 떠날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다 해도 이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가사와 목소리.

함께 걷는 길의 가사는 이보다 더욱 사랑스럽다. ‘함께 걷는 길 위에 그대와 나 둘이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면서 그대에 물었지. 당신 괜찮으냐고. 내게 속삭이네. 난 괜찮아요.’ 화창한 하늘 아래 들꽃이 군데군데 핀 초원을 걷는 기분, 어쩐지 노년의 부부가 구부정한 허리를 이끌고 걷는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자유롭게에서는 다정함을 넘어 든든함과 응원의 말을 전한다. ‘자기야, 자유롭게.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알잖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인 걸. 그러니 자유롭게 네가 되고 싶던 모습이 되면 돼. 천천히.’

그의 노래를 들으며 작업을 하다보면, 자꾸 떠오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문득 그리워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나도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싶어서, 누군가의 다정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다보면 그 결과물에도 어떤 다정함이 스며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