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하고 다 태워버려서 무엇도 태울 연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 번 아웃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와 버렸다. 오게 된 계기가 이성적인 것에서 감정적인 것으로 넘어가고,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 왔다는 점에서 보면 2012년에 왔던 두 차례의 번아웃과 유사하다.

당시에는 처음에는 직업적인 회의나 슬럼프 때문이었다. 나이는 먹었지, 학교는 늦게 왔는데, 이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건지 이걸 해야 되는건지, 뭔가 글쓰고 연극하고 하는데 한계는 온 것 같지, 그래서 그냥 휴학을 해 버렸다. 이제 연극 좀 안하고 머리 좀 식히면서 알바도 하고 여행도 다녀오고 해야지- 그런데 덜컥 공모전에 돼버렸네? 그때 정말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그게 행운이 아님을 절절하게 깨닳았다. 나는 그때 그 공모전에 됐을만한 실력이 아니었고,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때 쓴 작품 자체로는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랬다. 결국 작품이 끝나고 났을때는 정말 만신창이가 돼서 상처밖에 남지가 않았었다.

그때 악착같이 돈 벌어서 산티아고 순례길도 이비자 섬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도, 지금은 타 버린 노틀담 성당도, 바르셀로나도 다녀왔는데. 그때의 환기된 기분으로 참 오래도 버텼던 것 같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가 다시 닫힌채로 너무 오래 있었던 기분이다. 졸업을 하고나서 적어도 1년에 1번은 해외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너무 무리한 욕심이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욕심은 일상에서 너무 부렸었다. 졸업하자마자 1년을 내리 놀다가, 태극권에, 아르헨티나 탱고에, 학사 따겠다고 서울 디지털 대학교 입학하고 인터넷 강의 듣고, 그 와중에 글쓰고 공모전 내고… 아, 그러고보니 일주일에 한편씩 이렇게 칸투칸에 프리터로 글 써서 돈 번지도 꽤 됐다. 이거 일주일에 한 편 쓰는 것도 생각보다 꽤 노동이었다. 이런 일들이 잔뜩 내 일상을 꾸역꾸역 채우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번아웃은 이미 일상에서 오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올해 초에 학사학위는 따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태극권은 도장이 없어져서 동호회로 전환되면서 조금 널널해졌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좋아서 하는 마음을 유지할 만큼, 딱 그만큼의 강도만 유지하고 있다.

요번에 겪은 일들로 인해서 몇 가지 인생의 방향이랄까 목표를 좀 다르게 설정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너무 연극을 해야지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목을 매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연극을 해야지’, 하는 마인드 자체는 이 참에 아예 버리게 됐다. 연극을 함에 있어서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관계는 ‘동료’ 내지는 ‘동지’일진데 이번에 나는 너무 ‘친구’들과만 작업을 했고, 동시에 그들을 ‘친구’들로만 대했다. 거기서부터 패착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연극을 하는 것 자체보다는, 짧은 인생 내가 쓰고 싶었던 희곡들을 하나하나 써 나가는 것부터 먼저 집중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지만, 너무 조급하게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하다보니 상처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에서는 소홀해진 느낌도 강했다.

욕심. 욕심이 문제였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배삼식 극작가는 옆에서 누구는 등단을 하고 누구는 밖에 나가서 무슨 연극을 하고 상을 타고 하는 동안에도 흔들림없이 내공을 쌓듯이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준비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그야말로 추풍낙엽으로 내놓는 작품들마다 한국 극작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는 수준이었는데(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그에 비하면 너무 조급한 청년 극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쓴 희곡이 무대로 꼭 올라가는 걸 봐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오늘 서울문화재단에 최초예술지원 1차 합격자 인터뷰를 보러 가서도 한 이야기지만, 극작가라는 직업이 참 안타까운 직업이란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글로 쓰고 나면 끝나는 여타 문학 장르와는 달리(끝난다기보다는 곧바로 평가를 받는 작업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만), 일단 희곡은 애매하게 문학도 아니요 연극도 아닌 위치인데다가, 다 썼다고 곧바로 그것 자체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쓴 희곡은 반드시 공연으로 올라간 뒤에야 제대로 진정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내가 욕심을 부린 것도 지금와서는 이해도 된다. 나는 졸업을 하고 난 직후부터, 어딘가에 가면 직업을 ‘극작가’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내가 극작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요, 이외 어떠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 직업적 자아를 스스로 ‘극작가’라고 정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뒤에 찾아오는 조급함들이었다. 처음 3년은 잘 버티고 괜찮았다. 1년에 1편씩 글도 꾸준히 썼고. 그러다 작년 중순에서부터 그 조급함이 찾아왔던 것 같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뭔가 공연 활동을 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졸업을 하고나서 한번도 제대로 공연이 되지 못한 내 희곡들을 보면서(그렇다고 내 희곡들이 못 썼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가서 직업이 ‘극작가’라고 소개하지만 작품 활동을 한 게 뭐가 있느냐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시점에서.

내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무리하게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려고 한 게 아니었나 새삼 반성해본다. 생각해보면 이번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인 500만원의 창작 준비금으로 정말 시원하게 해외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는 게 그야말로 본질적인 ‘창작자의 창작 준비’에 더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나 싶다.

번아웃이 심하다보니, 인터뷰도 전심전력으로 하지는 못했었다. 이미 공연을 한 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창작자들처럼 ‘앞으로 이렇게 공연을 만들겠으니 지원금 좀 주십쇼’ 가 아닌, ‘이미 공연 끝났고 뭐… 포스터라도 보여드릴까요?’ 라는 식으로 말이 나오게 됐다. 뭐 실제로는 저거보다야 더 성의있게 말을 했지만. 뭐랄까 지원금 받겠다고 거기 앉아있는 것도 뭔가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일기를 좀 쓰고 싶었다.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잠이 들었다. 집에 오는 전철에서,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잠이 들고 뻗어버렸다가 일어나니, 머리가 아팠다. 공연 준비중에 내 화를 못 이겨서 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친 적이 있는데, 그때 하필 턱관절이랑 연결되는 저작근을 내리쳐서 부었는지 지금도 입만 좀 크게 벌리면 머리가 아프다. 이래저래 내가 나한테 상처를 참 많이 준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움직이긴 했다. 태극권 도장이 동호회로 바뀌면서, 이제는 관장님이 없으니 우리중 수련 연차가 높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지도원으로 활동을 하기로 했는데, 가장 연차가 높았던 누나가 휴가를 가면서 내가 대타를 뛰게 된 것이었다.

도저히 이거는 제껴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 몸을 좀 움직여서 아무 생각없이 운동을 좀 하고 싶기도 했었고, 주말에 승단 심사도 있었기에 태극권은 빠지기가 그랬다. 가서 정신없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또 정신없이 운동을 잔뜩하고 땀을 뺀 뒤에 바깥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기분이 좀 좋았다. 날씨가 아주 덥지는 않은 초여름의 기운이라 그랬을까. 미세먼지도 많아서 사실 크게 기분 좋을 날씨는 아니었건만, 밤이라 미세먼지가 많은지 적은지 분간이 안가는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기사님 식당’ 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기계우동 집이었다. 중학생 시절, 보라매 공원 근처 신림동에서 살 때는 동네에 새벽 늦게까지 하는 기계우동 집이 있어서, 지나가다 간판이 보이면 들어가 사먹곤 했었다. 한그릇에 고작 2000원. 오뎅이나 새우, 고기같은 하여간 단백질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뜨끈한 국물에 후레이크와 김, 파, 고춧가루를 셀프로 부어넣고, 면발은 기계에서 뽑은, 10년동안 가격한번 안 바뀌던 그 기계우동이. 여름밤 횡단보도를 건너며 번아웃이 왔던 내게 눈에 띠고, 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곧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겠다고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서 집으로 왔겠지만, 그때는 뭔가 홀린것처럼 그 간판이 있는 기계우동집으로 들어갔다. 우동보다도 짜장면이 갑자기 땡겼다. 운동을 하고 나서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자연스레 들어가서 앉자마자 짜장면을 시켰다. 값은 신림동보단 비싼 4000원이었다. 과연 기계우동집답게, 시키자마자 1분만에 짜장면이 나왔다. 역시 고기나 양파같은 눈에 띠는 재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짜장소스에 무심하게 갓 뽑은 국수가 털썩 주저앉듯이 그릇에 담겨져 나온 비쥬얼. 젓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비비는 고급스러운 수고는 할 필요도 없었다. 한손에 잡은 젓가락으로 휘휘 젓고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니 다 비벼진 상태였다. 크게 한입 면빨을 입안가득 빨아먹은 뒤, 곧바로 김치를 먹었다. 달고, 짜고, 맵고, 시원한 맛. 그리고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공기. 낡아빠진 TV에서 나오는 21세기의 프로야구 중계. 땀에 절은 와이셔츠를 입고 벨트는 제멋대로 풀어헤치고는 우동 한사발씩 하고 있는 맞은편 테이블의 택시기사 아저씨들.

문득 그 순간에, 잃어버렸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 탱고도, 그저 쉬고싶은 마음에 잠시 잊어버리고 있는 지금. 태극권조차, 이제는 의지할 도장조차 없어진 신세라 맘고생의 한 요소인 지금. 연극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정당하게 넣은 공모사업에서조차 뭔가 부끄런 마음이 들고, 사는 것 하나하나가 다 어색해지던 지금에, 그 기계우동집에서 모처럼 여유로움과 일상을 되찾았다.

그렇게 밤공기와 짜장면에 취해서, 이제 앞으로 하나하나 할 것들을 상상하며, 괜히 기분이 조금 좋아졌었다. 잃어버린 일상을 이제 이렇듯 하나씩, 다시 되찾아가볼 생각이다. 너무 서두르진 않으려고 한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다시 확인하는 작업은, 너무 서두르다보면 귀중한 것들을 놓치는 법이니까 말이다. 지나칠 뻔했던 그 짜장면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