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맘먹고 불편하게 하겠다니 불편할 수밖에

 

–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불편한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불쾌한 명감독!

난 데이빗 린치 감독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마음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저곳에서의 무엇을 자꾸만 자극한다. 잊고 있던 부유물과 같이 떠오르는 그 느낌은 낯설다. 그 낯선 느낌은 나를,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현재의 나’를 자각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그 불편한 느낌 안에서 꿈틀댄다. 자꾸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데이빗 린치 감독은 그래서 불쾌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영화를 통해 들었다 놨다 한다는 건 명감독이란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젠 ‘불편한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불쾌한 명감독’이란 타이틀을 봉준호 감독에게 주어야 할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서다.

변수(變數)에게 계획이란 없다!

기우(최우식)의 가족은 서로에게 자꾸만 묻는다.

“그래서 계획이 뭐야?”

잘 짜인 계획인 줄 알았던 일들은, 점점 풀리다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주인공들의 인생을 꼬아 놓는다.

그러더니, 결국 기택(송강호)은 고백한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계획하지 않으면, 계획이 잘못될 일도 없다”

변수(變數)는 상수(常數)에 좌우된다.

상수가 변하면, 변수는 요동한다. 기생충은 변수다. 숙주라는 상수에 그 존재는 번식하거나, 소멸된다. 그러니, 애초에 계획 따윈 무의미한 발상이다. 변수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짜도, 상수에 따라 그 계획이 결정된다. 사실, 기생충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저 숙주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숙주에 조금의 피해도 줘선 안된다. 숙주가 그것을 알아차리거나, 숙주가 잘못되면 기생충도 무사할리 없으니까.

수직적 미장센의 의미

‘기생충’의 장치는 수직적이다.

수직적인 미장센은 너무나 또렷해서 노골적이다. 설국열차가 사회계급을 수평적으로 풀어냈다면, 이번 영화 기생충에선 그것을 수직적으로 설계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설계’라고 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계급’은 원래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다만, 설국열차의 수평적 계급 구조는 수직적 강압(메이슨, 틸다 스윈튼 역)으로 다스려지고 있고, 기생충의 수직적 계급 구조는 수평적 (돈이 많아 착한 부자) 관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수평과 수직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건, 결국 ‘설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은 (자연이 설계했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폭우’는 수직적 미장센의 도구로 쓰였다. 폭우 속에서, 박사장의 집을 나와 그들의 집으로 도망치는 기택(송강호) 가족은 하염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기우(최우식)가 잠시 멈춰 섰을 때도, 그 물은 네 위치를 잊지 말라는 듯 끊임없이 아래를 향한다. 흐르고 흘러, 내리고 내려간 그곳에서 그들은 물에 잠긴 집을 발견한다. 절망을 마주한 것이다. 수직적 구조의 아래에 아주 자연스럽게 움트고 있는 그것. 영화의 전반을 희망의 메시지로 지탱했던 ‘수석(壽石)’도 빗물이 들어찬 집에서, 마침내 불운의 도구로 변신하고 만다. (물에서 떠오르는듯한 수석의 모습, 계단에서 묵직하게 굴러 떨어지는 수석의 모습은 상반된다. 이 상반된 모습 속에서 선명한 봉준호 감독의 입김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이러한 개입에 당황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엔 나라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고만다.)

관객과의 대화
기생충 vs. 기생충

“그 검은 상자를 저와 함께 열어보시겠어요? 어머니?”

기정(박소담)이 연교(조여정)에게 이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반응한다.

그리곤, 이내 그 검은 상자 안에는 자신이 있을 거란 걸  깨닫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나는 기생충은 아니다’란 관객의 방어막을 부순다. 박사장이 ‘냄새’에 관하여, 자꾸만 선을 넘는다고 하고 그 ‘냄새’는 지하철에서나 맡아봤을 그것이라는 대사에서 관객은 무장해제 된다. 관객 중에 ‘지하철’을 타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고 발버둥 쳐봤자, 반지하에서 나는 냄새는 온 가족에게 스며들었듯이 지하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박사장이 맡은 냄새가 난다.

압권은 기생충과 기생충의 만남이다.

예전 가정부와 기택(송강호) 가족의 만남은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다. 불우한 이웃끼리 수평적으로 만난 그 사이에서도 ‘권력’을 가지려는 수직적 분투가 일어난다. 기생충끼리의 싸움은 처절하다. 기생충의 존재 목적은 번식. 그 처절한 본능은 봉준호 영화에서 ‘가족’으로 상징화된다. 각자의 가족을 지키려는 기생충들은 그래서 양보할 수가 없다. 두 기생충이 공생해서, 자칫 숙주가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그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같은 월급쟁이들끼리 왜 이렇게 지지고 볶고 힘들게 살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건, ‘같은 월급쟁이’라서 그렇다는 걸 영화 기생충에서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됐다.

작품 속 작품

영화 ‘기생충’을 보면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하에 숨어 있던 가정부의 남편은 ‘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노숙자를 떠올리게 하고, 수재민이 모인 어느 대강당에서 잠을 청하는 가족의 모습은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어설프고 웃음의 소재로 전락한 형사의 모습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냄새를 참기 위해 코를 막은 박사장에 칼을 꽂는 기택(송강호)의 모습을 보면 분노에 차 열차의 앞쪽을 향해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떠오른다.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선’이다.

‘선’을 넘어 발생하는 일, 과정, 이야기. 넘을 선이 있다는 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는 건 분명 선은 존재한다는 메시지다.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든 아니든, 또 그것이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상관없이.

기어코 불편하게 하겠다니, 불편할 수밖에

기택(송강호) 가족과 함께 숨죽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부지불식간 혼연일체가 된다.

가족이 무사히 빠져나갔을 때 안도하고, 물에 잠긴 집을 볼 때 안타까워한다. 지하철이 언급될 땐 출퇴근 길을 떠올리고, 기우(최우식)가 송강호가 갇혀 있는 집을 사는 상상의 장면이 나왔을 땐 잠시 잠깐의 헛된 희망을 가져 보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검은 상자 속 우리 모습을 자각하게 하고 기어이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은 매일을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하루하루 죽어가는 걸까. 기택(송강호) 가족과 같이 그렇게라도 살아야 할까, 아니면 그냥 죽어버려야 하나. 불편한 마음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숙주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하게 살아가야 생존이 가능한 기생충은 왜 욕을 먹을까?

기생충은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파고들어 기생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사는 나라엔 기생충이 거의 없다. 소득 수준이 낮거나, 위생이 좋지 않은 곳에서의 번식이 더 활발하다. 박사장 가족도 돈으로 보면 강자일 수 있으나, 심적으로 보면 약자다. 믿을 사람도 없고,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좋지 않은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아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결론은 슬픈 영화, 슬픈 기생충

숨을 죽이다 폭주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면 숨이 멎는 것만 같다.

심장의 박동수로 보면 영화 기생충은 어느 액션 영화, 스릴러, 공포물에 맞먹는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심장 박동수가 요란해도 머리로는 ‘나는 기생충인가? 아닌가? 지금 나보고 기생충이라 영화는 말하고 있는가?’란 복잡한 생각을, 마음으론 기택(송강호) 가족의 비극과 자신의 현실(최소한 주변에 널린 절망적인 상황들)을 마주하며 이내 슬퍼진다.

기생충은 비열하긴 해도 탐욕스럽진 않다.

탐욕을 품는 순간, 선을 넘는 순간, 숙주는 그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상수가 변하면 안 된다. 변수의 입장에선. 그러니 기생충의 존재는 슬프다. 기생충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도 슬프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를 쉬이 뜨지 못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어느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이 쿠키 영상이 있을 거란 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황금 종려상을 받은 영화라서 기립 박수를 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아마도, 그건. 자신이 기생충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에서 본듯한 어디에서 겪은 것만 같은 현실을 마주해서가 아닐까.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나도 그랬다. 불편한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