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연극인이 두 명 있는데 두 명이 다 미투로 잡혀들어갔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투로 고발당한 작가의 작품이 연극제에 출품이 되어 논란이 됐었는데, 주최측에서는 ‘작가는 작가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면서 참가측에서 공연 가능 여부를 물어보았을 때 공연을 허가했었다고 밝혀 사후 논란이 되었고, 이에 결국 공연이 직전에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글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작가는 작가이고, 작품은 작품이다’ 라는 냉정한 이야기에는 동의를 한다. 그러나 주최측이나, 참가측이나, 판단력에서 아쉬움이 많이 보이는 대목이다. 해당 작가가 미투로 고발당하고, 연극계에 미투 사태가 연속적으로 터진 지는 불과 1년,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재판이 현재 진행중이며,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 입장에서, 굳이 그 작품으로 연극제에 출품을 하고, 또 공연을 허가 한 것은 상당히 배려가 없는 행동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막상 그렇게 ‘작가와 작품을 분리’ 했다면 마지막까지 그 논리를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이 내린 공연 취소 결정은 그들이 내렸던 결론이 그렇게까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예술관을 통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로 인해 공연이 취소당한 당사자들과, 미투의 피해자들까지 광범위한 정신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영화와 연극을 나름대로는 비교하게 되기도 했다. 미국의 영화감독, 2002년 <피아니스트>로 깐느에서 황금종려상까지 받은 로만 폴란스키는 비록 실제 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에서 어머니가 죽고, 영화 감독 데뷔 후에는 연쇄 살인마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에게 아내와 아이까지 무참히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지만, 이윽고 그의 어두운 과거를 안다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 그는 13살의 소녀였던 사만다 가이머를 성폭행하여 재판을 받던 중 유럽으로 도피한다. 최근에 나온 증언을 다 합치면 그는 4건의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며,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는 잘만 영화관에 걸린다.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정말 글자 그대로 ‘피가 튀기는’ 혈전이 벌어질 정도가 되는데, 당사자인 폴란스키는 그딴건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를 잘만 찍어댄다. 찍기만 하나? 상도 준다. 상만 주나? 미국 아카데미 위원회에서는 제명했던 폴란스키를 다시 아카데미 회원으로 복권시키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전세계 모든 영화 관계자, 거기에 더해 단순히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마저도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것이고,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를 떠올리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또 모르지. 역겨워하다가도 ‘그새끼 영화는 참 잘 만드네’ 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글의 서두에 이야기했던 2명, 미투에 고발당한 2명은 오태석과 이윤택이다. 오태석과 이윤택이 정말 나쁜 인간들인건,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만든 ‘작품’은 정말 훌륭했기 때문이다. 차마 ‘연극’ 이 훌륭했다고는 말하지를 못하겠다. 연극은 무대, 배우, 관객, 이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배우를 기만하고, 배우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고, 배우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줘가면서 공연을 만들었는데, 그 ‘연극’이 훌륭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들이 만든 그 ‘작품’은 훌륭했다. 아니, 훌륭했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제 두 번다시 그들의 작품이 공연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기 때문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피아니스트>는 요즘도 가끔가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이 되는데, 이제 그들의 작품은 볼 수가 없다. 사실 그 ‘작품’ 같은 걸 다시 보지 못하는 건 개뿔 아쉽지도 않다. 중요한 건 그 두 사람이 만들었던 작품들보다도 그들의 ‘스타일’이다. 적어도 작품들이 독보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 연극의 풍토 안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으면서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높은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제일 짜증나는건 그들이 범죄자인 주제에 선생질, 선배질, 꼰대질을 해대던 인간들이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그 ‘스타일’을 후대에 남겨놓지를 않았단 것이다. 그들의 범죄가 어떠했건 간에 그들의 미쟝센이나 연기법, 연출의 일관성 등은 적어도 후대에 남겨 더 발전시킬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근데 그들이 미투로 사라지면서 그들과 함께 그들의 스타일, 그것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애시당초 좋은 연극인도, 선생도, 선배도 아니었단 걸 의미한다.

결국 그들이 한국 연극계에 남겨놓은 것은 거대한 똥인 것이다. 그들이 싸질러놓고 후배들이 치워야 하는. 위계와 강압, 억압, 폭력으로 유지되던 완벽하게 실패한 연극판. 그야말로 어찌어찌 치우고는 있다만, 여기 치우면 숨겨졌던 뭐 하나가 또 고개를 들이미는 형국의.

시간이 꽤 흐른 뒤의 미래에, 우리는 당당히 그 과거의 사태에서 배운 게 있으며,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고, 마침내 결실을 봤노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을까?

얼마전 6월 4일은 천안문 사태 30주년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은 무얼 배웠는가?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홍콩에서 100만명이 모이는 시위가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국방부는 대만을 국가로 사실상 인정했다. 무역 전쟁은 격화되고 있고, 세계는 혼돈으로 휩싸이고 있다. 적어도 미국과 홍콩은 30년 전의 베이징 광장에서 뭔가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나서, 이런저런 음모론들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아직까지도 몇몇 음모론은 현재 진행중이다) 그때는 이미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후였고, 새 대통령이 뽑힌 후였다. 그때 누군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우리가 세월호에서 배운 것은 아직까진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고. 오래된 선박을 관리없이 허술하게 사용하여 돈을 버는 행위, 그리고 느슨하게 풀어둔 선박의 적재 용량에 대한 것,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가장 먼저 바뀌었어야 할 것들이 정작 바뀌지 않았다. 우리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새 대통령을 뽑는 동안, 정작 손볼 것은 손보지 않았으며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돌리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에도 오래된 선박이 엄청난 화물을 과적하고 사람들을 잔뜩 태운 채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게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세월호 사건에서 뭘 배웠는가?

연극계 미투는 어느새 영화계 미투로, 연예계 미투로 옮겨붙었다. 그런데, 우리는 미투에서 무얼 배웠는가? 여전히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은 예전만 못하다뿐이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과거에서 무얼 배웠는가? 역차별 논란, 여성 할당제,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 꽃뱀 논란, 여경 무용론, 끊임없이 혐오가 혐오를 낳는 남녀 대결 구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 사회 곳곳에 녹아있는 억압적이고, 위계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이고, 파시즘적인 문화를 우리는 조금이라도 고쳐나갔는가?

아직까진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 보인다.

아직까진 시작이라 그럴 수도 있다. 지금 막 시작 됐기 때문에 뭔가를 배우기엔 일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우리를 진지하고 차분하게 되돌아보기엔 피가 너무 끓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 적어도 우리 안에서 대화는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안에서 서로가 편을 갈라서 목소리를 높이는 싸움과 언쟁은 있지만, 과연 진지하게 토론이나 논의가 존재하는가?

토론과 논의는 부재하고 싸움만 있는 이유는 결국에 우리가 ‘사람’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책임질 사람을 찾는다. 우리는 미투를 통해 이윤택과 오태석을 끌어내렸다. 탄핵을 통해서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어떤 건설적인 대책들이 세워졌는가. 우리 안에서 법과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있었는가?

사람에 책임을 지우려는 행위는 결국 ‘책임지고 사람을 끌어내리든’, 아니면 그게 실패해서 ‘내가 다 독박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딘가에서 고독하게 화병으로 죽어가든, 둘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군대에서 사람이 다치면 우스개소리로 ‘잡아갈 땐 국가의 아들, 다치거나 죽으면 느그 아들’ 이라고 하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법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누군가가 책임지고 피해자를 구제해줘야 하는데, 책임질 사람은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고 때로는 책임져야 될 사람이 가해자이니, 결국 피해자가 독박쓰고 다치고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싸울 수 밖에. 내가 책임지지 않으려면, 너가 책임져야 하니까, 토론이고 논의고 법과 시스템, 문제점의 개선에 대한 논의는 다 집어치우고 일단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너가 책임을 져야 되는 건 둘째치고, 내가 책임을 안 지려면 일단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게 일단 내가 사는 길이고, 대한민국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곳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과거의 잘못과 아픔, 그것을 통해 발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로 책임질 사람을 찾아서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해낸 적은 거의 없다. 518 민중 학살은 여전히 책임자가 없다는데, 누구는 아직 살아 계신 와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희호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12. 12 사태를 겪고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다 박살냈다지만, 세월이 지나서 군대 내에서는 사조직이 있고, 꽤 큰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는 서로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만 너무 힘겹게 싸워 왔다. 우리는 단지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뒤의 세월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정중한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이고, 토론이고, 논의이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순간,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 축구 팀이 사상 최초로 FIFA 주관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다. 우리는 이제 대화와 토론, 논의 정도는 우리에게 허해도 될 수준이다. 우리 스스로를 너무 미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