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 본업이 극작가니까 당연한 이야기같겠지만, 의외로 셰익스피어 싫어하는 작가들도 많다. 재미가 없다거나, 혹은 한 편의 셰익스피어 희곡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들도 꽤 있다. 근데 작가가 셰익스피어를 모르거나 싫어하거나 안읽어봐도 되는거야? 라고 물어본다면, 응. 너네도 잘 안읽잖아. 셰익스피어를 희곡으로 읽어본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까? 나조차도 셰익스피어가 쓴 이야기들이 다 소설이거나 구전되어 오는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지 원작이 ‘희곡’인 줄은 배우기 전까진 모르는 사실들이었다. 더군다나 실제로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들은 소설화가 되거나 동화화, 영화화 되어서 줄거리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발생하는 폐해가 뭐냐면 다들 ‘셰익스피어’를 읽어봤다고 착각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희곡으로 읽어야 진짜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희곡은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어지간하면 역할을 정해서 낭독으로 읽어보는 게 좋고, 또 가능하다면 연극으로 공연되는 걸 봐야 되고, 마지막으로 실제로 본인이 그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가 되어 보는 게 가장 좋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낭독을 해 보고, 공연으로 상연되는 것을 보고, 실제 연극에서 역할을 맡아서 배우가 되어 보는 것. 이 정도까지 한다면 당신은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정말 잘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게 된다. 이건 단순히 가방끈이나 학력, 지적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저 4단계의 경험을 해 본 사람은, 그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길어내어 오게 된다. 그래서 연극이 ‘전문가’의 영역이고 ‘기술자’의 영역인 것이다.

가끔 셰익스피어 전문가라는 분들의 강의를 듣다보면, ‘비 연극인’인 분들의 강의는 무언가 비어있고 겉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교수이고, 박사이고 이런 걸 다 떠나서, 4단계의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이가 말하는 강연은 이야기와 캐릭터의 깊은 곳을 건드리면서 말해주지 못한다. 그 깊은 곳에 있는 것은 그저 머리로 많이 안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좌우간 이런 과정을 해보고싶다고 아무나 겪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를 오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 희곡을 읽을 때는 길잡이가 필요하고, 낭독을 할 때는 주의깊게 나름대로 연기를 하며 흐름을 타야 하고, 실제 공연을 보면서는 내가 읽어낸 텍스트와 연출과 연기가 해석해낸 텍스트의 차이를 보고 느껴야 한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연극을 하는 데 배우로 참여하는 것은, 굉장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반인이라면 동호회 레벨에서도 자주 접하기가 힘든 경험이다. 낭독 까지는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가능할수도 있겠지만, 낭독도 목소리만 좋다고 잘 되는 건 아니어서 분위기가 흐려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예술 대학이 괜히 따로 있고, 괜히 연극이 전공으로 구분되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내가 그래도 일반인과는 상당히 다른 레벨의 기술을 훈련하고 갖추게 되어있다는 것을 그럴 때마다 간혹 깨닫게 된다.

나도 처음부터 셰익스피어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읽어야 될 희곡은 너무 많았는데, 고전이라고 셰익스피어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다, 처음에는 고전들 와중에서도 분량이 특히 길고 시적인 대사가 많아서 좀 짜증까지 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읽고, 낭독하고, 공연을 보고, 운이 좋게도 친구가 각색하고 연출한 기말 장면 발표에서 연기까지 해볼 기회를 얻고 나니, 저 바다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길어올리고 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셰익스피어는 참 희한한게 처음에는 그냥 공부의 한 과정으로 짚고나 넘어가자, 싶은 마음이 들고 이런걸 뭘 세대를 잇고 이어서 계속해서 재발견을 하니 마니 하는 걸까 하는 마음이 계속 드는데, 파고들다 보면 정말 끝도 없는 깊이를 자랑한다. 더군다나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상업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작가이자 연극인이었으니, 기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보통 예술성을 성취하면 상업성은 포기하게 되는데, 이 인간은 세대를 이어서 상업성과 예술성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게 되고, 나중에는 혼자서 목표로 세운 것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내 나름대로 각색해보는 것이었다. 그 첫 과정이 올해 초에 연극으로 공연한 <햄릿>의 각색 <핵릿> 이었고 말이다. 해놓고 나니 무지막지하게 힘든 작업이었기에 또 언제 이 계획이 다시 재가동될지는 모르겠다.

길게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오셀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오셀로는 사람 이름이다. 훌륭한 군인이고, 이미 지는 게 확정적인 전투에서조차도 승리를 쟁취하고 돌아오는 그야말로 영웅이다. 아름다운 미인까지 부인으로 두고 있으니,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라고 할 수가 있다. 딱 하나, 그의 신분이 <오셀로>라는 비극의 가벼운 시작이다. 그는 흑인이다. 정확히는 무어인이라고 나오는데, 배경이 되는 스페인에서 흑인들을 싸잡아서 부르던 말이 바로 무어인이다.

또 특이한 점이라면 오셀로는 이야고라는 캐릭터와 뗄레야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보통 캐릭터 분석을 하면 <오셀로>에서는 오셀로보다도 이야고를 먼저 분석한다. 인물 창조를 하는 수업에서도 이야고는 자주 과제로 나온다. 이야고는 오셀로의 부하인데, 굉장히 맹목적인 혐오의 감정과 냉소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지 오셀로가 흑인 주제에 도시의 잘나가는 영웅이라 재수없기 때문에, 오셀로를 파멸시키고 그의 부인을 빼앗아 타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계획은 꽤나 성공적으로 끝이 나서 오셀로는 결국 모든 것을 제 스스로 파국으로 몰아넣고야 만다. 이야고의 캐릭터는 읽다 보면 ‘악마적 카리스마를 지닌 악당’에 대한 원형으로 여겨질만큼 매력적이다. 아마 배트맨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대입하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 실제로 조커처럼 이야고의 동기는 그저 별거 없을 뿐이고, 그는 인간의 약한 마음을 들쑤셔서 타락하고 파멸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성공한다.

오셀로라는 인물의 매력적인 점은 바로 지극히 인간적이란 점이다. 그는 아주 완벽한 인간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리가 있나. 도저히 믿기 힘든 거짓말을 하는 이야고를 그는 믿어버린다. 더군다나 나중에는 스스로의 의심과 불안이 더해져서 멘탈이 먼저 무너져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은 모두 제각각의 재미와 흥미 포인트가 있다. 햄릿의 경우는 숨막히는 정치 드라마이자 복수극으로서, 맥베스는 마법적이고 악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정말 광년이같은 광끼가 뿜어져나온다, 리어왕은 사소한 가족간의 갈등에서 시작하여 광야의 폭풍속에서 운명과 마주하는 인간의 절규까지 드라마틱한 스케일의 확장과 한계를 보여준다. 오셀로는? 사실 오셀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감정은 바로 ‘불쾌함’이었다. 오셀로와 이야고의 이야기는 보다보면 정말 묘하게 불쾌한 부분이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도 모르게 이야고의 감정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재수없어서 인간들을 들쑤시고 이간질하고 거짓말을하다보니, 인간은 파멸해간다. 그리고 대다수 인간들은 군중이 되고 집단이 되어 한목소리로 한사람의 인간을 매장시켜버린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미 그 옛날 그 시대에 셰익스피어는 이야고와 오셀로를 통해서 인간의 이 잔인함, 집단성, 치졸함, 악마성을 맨얼굴로 보여줬다. 누군가에게 악플을 달고 집단을 형성해서 헛소문에 한 사람을 매장하려 들고 그저 재수없고 싫기 때문에 한 인간이 반드시 죽었으면 하고 기도하고 저주를 하는 인간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셀로를 읽으면서 계속 한 사람이 떠올랐다. 축구선수 강수일이다. 혼혈출신이었고, 그 타고난 피지컬과 발전하는 축구 센스로 한때 국가대표 승선 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보였다. 혼혈 다문화 거의 1세대에 해당하는 청년이었고, 음주 파문 등 멘탈이 약한 모습을 줄곧 보였지만,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통해서 언론의 주목도 한몸에 받았다. 본인도 계속해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겠다는 인터뷰를 피력하기도 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그 약한 멘탈이었는데, 이미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한 인천 유나이티드 때부터 음주 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기량이 만개해서 국가대표 승선까지 하마평에 오르던 제주 유나이티드 시절에는 스테로이드가 검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록 기량 상승을 위한 도핑이 아닌 외모를 가꾸기 위해 스테로이드가 함유된 발모제를 바른 해프닝으로 넘어가고 여론도 호의적이었던 상황에서, 음주운전으로 충돌사고를 낸 뒤 옆자리에 동승했던 친구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여론은 폭발했다. 그 와중에도 소속팀인 제주 유나이티드는 강수일과 재계약을 원했고, 다시 갱생시켜보려는 듯한(당시에는 정말 국가대표에 승선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량이었다) 의사를 보였지만, 그는 스스로 일본 2부리그로 떠나버렸고, 현재는 태국 리그에서 뛰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딱히 나서서 그를 파멸시키려 한 이야고같은 인간은 없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받았던 차별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서 마음을 다잡을만한 기둥이 없었던 상황에서, 스스로 무너져내렸던 것 뿐이다. 그는 비록 지금은 다시 재기에 성공해서 태국 리그에서 뛰고 있으며, 반성도 했고 비록 롤모델은 더 이상 못 되더라도 반면교사로는 남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여론에서는 이런 말들이 많았다. ‘다문화 가정의 롤모델이 되어서 더 잘해야 될 놈이 가장 사고를 쳤다.’ 사실 이 말도 강수일 선수에게는 부담이자 일종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강수일 선수는 완벽하게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려운 가정 형편과 어려서부터 당해왔을 인종차별 등을 생각하면, 그에게 롤모델로서의 역할까지 요구하는 건 다소 가혹했다. 그는 케어를 더 받았어야 했지, 나서서 영웅이 되기를 강요받아서는 안됐다. 그리고, 애당초 악동 기질이 있는 선수에게 모범적인 캐릭터를 요구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요즘 유튜브에서 자주 보는 채널이 있다. 바로 파키스탄 혼혈 청년 ‘과로사’이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유창한 한국말로(당연하게도 그는 한국인인다) 게임을 하면서 시청자들과 욕설도 주고받고, 인종에 관련된 농담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한다. 돼지고기 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각목으로 맞은 썰, 학교에서 당했던 무수한 따돌림과 학교폭력, 이런 썰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에게는 강요할 캐릭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막 등장하기 시작한 이 다문화 1세대 청년을 대표하는 과로사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이다.

강수일 선수는 비록 한번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서는 중이다. 과로사는 새로운 청년 세대의 탄생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타나고 등장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아직 우리 사회 안에는, 우리들의 심리 안에는 언제든지 혐오와 갈등과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이야고가 남아있어 보인다. 새로운 청년 세대들 중에서 언제 또 오셀로같은 영웅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이야고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새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긴 글을 마친다. 계절이 바뀌고, 세상도 바뀌고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를 향해 투쟁하는 홍콩의 시민들에게 경의와 연대, 지지의 감정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