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축구팀 하고 싶어요.

학창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운동은 단연 축구였다. 태권도, 국술원, 유도를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기도 했지만 보다 자유분방하다는 점에서 축구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정해진 복장도 없었고(교복은 물론이고 청바지를 입고도 할 수 있다. 할 수‘는’ 있다.), 엄숙한 무도(武道)따위도 필요 없었다. 오프사이드니 프리킥이니 하는 규칙들도 친구들끼리 하다 보면 적당히 뭉개지곤 했으니까. 공 하나만 던져주면 오래 갇혀있던 대형견 마냥 입을 벌리고 뛰어다녔다. 발목을 삐고 종아리에 찰과상을 입는 것이 예삿일이었어도 개의치 않았다. “농구처럼 위를 보고 뛰어야 키가 크지, 허구한 날 땅바닥만 보고 뛰어 댕기니 키가 크겠나.”라는 엄마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마, 축구도 헤딩할 땐 위로 뛰는데요.

그 덕에 중학생이 되고부터 군대를 제대한 이십대 중반까지, 나는 공만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 축구가 11명이 한 팀인 종목이라고는 하지만 5,6명만 모여도 풋살은 가능했고, 하다못해 2,3명만 있어도 가성비 좋은 내기 게임을 할 수 있는데다가, 심지어는 혼자서 빈 벽에 있는 힘껏 슈팅을 차대면 스트레스 해소엔 제격이었다. 오히려 혼자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동네 축구라곤 해도 구력이 십수 년쯤 되니 영 실력이 형편없진 않았는데, 그것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만 해도 축구를 워낙 못해서 고민이 많았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축구를 잘했고, 그래서 학교 대표로 대회도 나가는데 나만 세모발이어서. 참다 참다 용기를 냈다. 1999년, 4학년 당시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이었고 때마침 학교 축구팀을 관리하고 계셨다. 축구팀이라고 해봐야 체계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저 시합 시기가 되면 공 좀 찬다는 아이들 모아 2,3주쯤 방과 후에 연습하는 게 다였지만, 내게는 그것이 간절했다. 담임선생님께 찾아가서 앞뒤 자르고 말했다.

“선생님, 저도 축구팀 하고 싶어요.”

  • 혹시 다른 종목은 어떠니?

지금 돌이켜봐도, 당시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처럼 축구를 못하는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겠지. 어쩌면 이미 마음으로 내정한 학생들이 선발부터 후보까지 탄탄한 스쿼드를 이루고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겨우 11살의 순진무구한 의욕과 용기를 대놓고 꺾어버리기는 어려우셨을 테다. 자상한 선생님은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축구팀이 되고 싶은 학생이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거라면서.(물론 축구팀이었던 내 친구들은 거친 적 없는 테스트다.)

시에서 주최하는 육상과 축구를 포함한 종합 소년체육대회쯤이었던 것 같다. 방과 후 운동장엔 축구 말고도 단거리 달리기, 멀리 뛰기, 씨름, 투포환 등등의 선수로 발탁된 아이들이 연습 중이었다. 나는 달리기로 출전하는 여자 아이들과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이들이었고, 몰래 의자를 뒤로 빼는 짓궂은 장난에 매번 속아 자빠지던 아이들이었다. 아무렴 이런 평범한 여자 애들한테 질 수야 없지. 이를 악 물고 뛰었다. 그리고 나는 졌다.

놀랍게도 의외로 걔네들은 빨랐다. 아니, 의외로 내가 너무 느렸던 걸까. 아무튼 패스나 슈팅 같은 축구의 기본기는 고사하고 동갑내기 여학생보다 달리기가 느려서야 테스트는 이미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주눅이 든 나는 다시 해보겠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고, 그래도 잘 할 수 있다며 오기를 부리지도 못했다. 끝났구나 싶었다. 그게 불쌍해보였던 걸까. 선생님은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다른 종목은 어떠니?

  • 내가 쏘아올린 작고 무거운 공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식용 개구리를 고와 먹은 후로 비실비실 허약 체질이던 나는 단숨에 팔씨름 왕이 되었다. 식욕도 왕성해지고 운동도 좋아졌다. 태권도, 국술원 따위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팔씨름으로는 나를 이길 친구가 별로 없었고, 친구들도 나를 근육몬(포켓몬스터 캐릭터 중 하나다.)이라고 부르곤 했다.

선생님은 운동장 조회대 아래 체육창고에 들어가시더니 잿빛의 둥근 알 따위를 하나 들고 나오셨다. 한 움큼에 딱 들어차는 크기였고 보기보다 묵직했다. 선생님이 제안한 종목은 투포환이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자세를 알려주셨다. 자 이렇게 포환을 얹은 손을 오른쪽 귀 밑에 붙이고, 시선은 전방 사십오도, 왼손을 쭉 펴서…. 축구가 아니라 실망스러울 줄 알았는데 나는 금세 반해버렸다. 오, 이거 생각보다 멋진데? 나는 하겠다고 대답했다.

일단 선수 등록(?)이 되자 유니폼이 나왔다. 흰 색에 빨간 라인이 들어간, 사각 팬티보다도 짧은 하의와 얇은 어깨 라인의 노란 민소매 상의. 축구 유니폼보다는 훨씬 민망하고 별로였지만, 내가 한 종목의 선수가 되었다는 실감만은 확실히 전해주는 복장이었다. 투포환 선수는 남녀 1명씩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였고, 그러니까 나는 김해내동초등학교의 하나뿐인 남자 투포환 선수였다! (여자 대표인 친구가 나보다 더 기록이 좋았던 것은 반전이지만.)

방과 후에 교실 구석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서는 기분이란. 다 같이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구보로 운동장을 돌고 각자의 영역으로 향하는 발걸음. 비릿한 쇠 냄새를 풍기는 포환을 들고 스텝을 밟는 리듬과 오른팔이 뻗어나가는 방향으로 몸을 내던지듯 포환을 밀어내는 무게감까지. 길어봐야 3주가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나는 꽤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드디어 대회 당일. 공설 운동장에 모여 개회식을 하고, 각자 종목이 행해지는 장소로 가서 순번대로 포환을 내던졌다. 방향이 동쪽이었던가. 포환이 손에서 떠나는 순간, 하늘이 유난히 눈부셨던 기억이 난다. 마치 진짜 선수라도 된 것처럼 고무되어 있던 훈련 기간에 비해 실전은 허무하리만치 금방 끝이 났다. 두 번인가 세 번인가 포환을 던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최종 순위 8위에 그쳤고 함께 여자 대표로 출전했던 친구는 나보다 순위가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메달을 받았던가.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찬송이었는데.

  • 개인주의적 운동, 개인주의적 작업

아무튼 그렇게 나 혼자 진지했던 대회는 끝이 났다. 당시 우리 학교 축구팀은 준우승인가를 했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의 단체 사진과 트로피가 학교 1층 중앙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었다. 축구팀에 들고 싶어 시작했다가 투포환 선수로 막을 내린 나의 시합 일대기는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사진도 없고 상장도, 트로피도 없다. 때문에 이렇게 기록해두는 내 기억만이 유일한 증거인데, 이것도 세부 묘사는 100% 믿을 것이 못 된다. 어쩌면 나는 내 기억보다도 훨씬 더 달리기가 느렸고, 투포환조차도 형편없는 실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선생님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어서 함부로 거절할 순 없고 이도저도 될 것 같진 않으니 가장 비인기 종목이자,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종목인 투포환을 추천해주셨던 게 아닐까. 축구공을 발로 차는 대신 포환을 손으로 밀어내며 끝난 1999년의 기억.

서른을 넘긴 요즘은 축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않는 것이기도 하고 못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실 예전만큼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건강하자고, 재밌자고 하는 경기에 목숨 걸고 덤비는 것도 부질없고 몸싸움 해가며 감정 소비하는 것도 지쳐서. 대학 선후배들과 하는 축구 동호회에는 꼬박꼬박 회비만 내고 아주 가끔 얼굴을 내비친다. 그것도 인원이 안 나와서 우리끼리 풋살이나 해야 할 때에만. 다른 팀과 승패를 두고, 자존심을 걸고, 몸을 내던지며 하는 축구는 이제 재미가 없다. 아니 열정이 없어진 걸까.

그래서 요즘은 혼자 하는 운동이 좋다. 달리기라든가,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든가, 수영 같은 것들. 남을 이기려고 아득바득 애쓰지 않아도 되는 종목들. 모두의 템포가 아니라 나만의 템포에 맞춰 진행할 수 있는 것들. 정확한 자세와 호흡으로 운동하면 어느 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몸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들. 하다보면 체지방이 걷히고 근육이 더해지는, 그런 운동들.

쉽게 말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운동들이 좋다. 가끔 남과 경쟁하고 협동하며 성취감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매번 그러기엔 내 성정이 꽤 예민한가 보다. 나이 들면서 취향이 변한 걸까. 어릴 땐 그토록 축구를 좋아했으면서. 평일, 주말, 방학, 심지어는 시험 기간에도 축구를 해댔으면서.

학교 투포환 대표 선수로 출전했던 기억을 되짚다 보니 꼭 취향이 변했다고만 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축구팀 탈락’과 동의어이거나 그보다 더한 놀림거리일 수도 있는 ‘투포환 대표 선발’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건, 그때부터 나는 개인주의적인 운동이 적성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의 동작에 집중하고, 기록을 내고, 만족하는 것.

어쩌면 글 쓰는 일을 밥벌이로 해보겠다며 고군분투하는 지금도 일종의 투포환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노력과 집중. 컴퓨터 키보드를 다다다 쳐대는 손끝에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활자의 포환들이 내던져진다. 1999년으로부터 꼬박 20년 뒤의 일이다. 그 시절의 꼬마는 이런 미래를 예측이나 했을까. 홀로 내던지는 일이 업이 될 줄을. 요즘 내가 하는 운동을 개인주의적 운동, 나의 업을 개인주의적 작업이라고 불러본다.

새삼 내게 투포환을 추천해주었던, 1999년 박영식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다.